♧ 스무 살 꽃다지, 그곳 – 김항신
달빛에 눈물이 묻어 있었다
닻을 내린 항구가 하염없이 질척인다
출렁이는 물결이 통곡을 한다
하얘진 보름달
바다에 스미다 울다 웃다가 파르르 떨었을
우리 어멍
어느 바당 미역국 먹어질까 노심초사 헤매던
가슴 불덩이 잠재우다 이제야
홀연히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아니 생각에 생각했을지도 몰라
너울너울 옷고름 벗어던져 왔던 길로 다시,
물이 되어 왔나요
가지런히 신발 벗어 인사했던가요
어머니 가슴에 파고든
스무 살 꽃다지
그곳에선 안 아프던가요, 언니
♧ 엄마의 집 – 김항신
차갑다
따뜻하게 데워있던 넓은 아궁(兒宮)
초경을 맞던 어느 날은 그냥 그러는 것이겠지
초가을 쌀쌀한 날이면 그냥 그렇게 생리통이라지
스커트 자락 휘날릴 때 그때는 참으면 되는 거라지
그래도 엄마의 집은 따뜻한 시절이 많았다고 착각만 하는 거라지
착각은 자유라서
경험이 모자라서
의사가 아니라서
아니 언제나 그대로일 것 같은
처음처럼 살았던 맛이 아닐까
세상 모든 여신들의 마음이 아닐까
이렇게 자부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맹목적으로 터를 잡고 있는
평생지기로 살고 싶은 날도 더러는 있었지만
애를 태우는 널 어쩌면 좋을까, 흡혈귀처럼
♧ 복수초 – 김항신
너는 어쩜 그리도 날 닮았을까
아니,
그게 그런 게 아니라
나와 태생이 같다고 하는
너는,
봄인데도
한풍에 설화라 했지
나
도
그렇지 그렇게
꼿꼿이
너처럼 그렇게
쳐다봐 달라고
꽃 대궁 데워
함초롬하게 있었지
♧ 9동 카페 – 김항신
음악이 흐르고
낯선듯하나 낯설지 않던
시사모와 웃음 짓는
행운의 클로버 후~우
사뿐 내려앉는다
나무와 새들이 노래하며
칼바람
휘모리 치는 바람의 언덕
추위도 없이 흥에 겨운
축제의 날
‘신춘문예’ 물오른다
옛 시인의 가락
서울 대구 부산으로
실어내고
시인의 숨결에 묵념하듯
숙연해지는 순간
웍새들
축제 물결에
바람의 지문 찍고 있다
♧ 시드니 호텔 – 김항신
가문동 골목이 있고
가문동 바다가 있고
가문동 등대가 있어
자꾸 이 앞을 지날 때면
옛 추억이 아른거려
자꾸 아른거려
오는 길에 다시 보고
가는 길에 다시 봐도
시간 속 여행 덮으려는 뇌 한구석
이렇게 십 년 세월 훌쩍 넘겨
가물대며
아날로그 속에 숨 고르는
가문동 편지 한 장
♧ 연화 – 김항신
차 한 대 겨우 지날까 말까 한
마을길 따라 들어서면
서까래에 좀이 슬기 시작한
암자가 있다
어릴 적 같은 마을 살았던
비구니 스님
기왓장도 서까래도
민머리 서리 내리듯
해 지는 서쪽 향해 앉아 있다
사람 드나듦이 뜸한 공양간 앞 모퉁이
호박들이 아무렇게 뒹굴고 있기에
하얀 솔가지 털털 대며 옷깃 여미던
어느 날
집으로 가져와
비우고 채우고 여미니
오롯이 앉아 가부좌 틀고 있네
*시 : 김항신 시집 『라면의 힘보다 더 외로운 환희』(도서출판 실천, 2021)에서
*사진 : 반딧불이 내린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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