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파나무
한겨울 솜털 속에
몽글몽글 꿈을 키우던
비파나무 가지 사이
쉬엄쉬엄 내미는 열매
웃음꽃 노란 송이가
내 아이를 닮았다
♧ 꽃무릇 - 김정숙
당신이 반려한
고백 때문입니다
폭우 속 절절 끓인
저 대책 없는 문장은
무릇, 또
수취인불명
한참이나 붉겠죠
♧ 귤꽃 학교 – 김조희
귤꽃도 글을 읽는 수산리 마을학교
봄 햇살에 터지는 꽃망울 소리들이
울타리 돌담 너머로 향기처럼 퍼지고
아름드리 가지마다 하나둘 매달려
하늘 향한 팽나무 손가락을 잡으면
가만히 허리 굽히며 제 등을 내주고
층층이 쌓아올린 아이들 웃음소리
꽃이 핀 화석처럼 울타리를 지켰지
수산리 수산진성에 발자국 또 찍으며
♧ 이름을 읽다 – 신해정
학교 가는 친구 보면서 남몰래 울었지
남의 밭일만 하며 몇 십 년을 살았어
소처럼 일하고 먹으면 사는 줄로 알았지
부모님 묫자리 표지석도 못 읽었어
팔십 넘어 배운 글로 부모님을 만났지
얼굴은 생각 안 나는데 신절혜 정연북이라
♧ 상사화 – 최은숙
꽃과 나 사이로
갈바람이 지나가네
이별
그 너머로
강물이 흘러가네
그대가
돌아선 자리
상사화가 피었다
♧ 봄 – 허경심
아파트 놀이터에
새순들이 아이들 같다
조팝나무 실가지에
줄을 지어 나서는 봄
바람도 그네를 탄다
하하호호 봄이다
♧ 백사장 백로 한 쌍 - 현희정
함덕 백사장에
북서계절풍이 분다
추울수록 김이 솟는
겨울바다 체온 밖으로
이제 막 백로 한 쌍이
하얀 깃을 펴는 날
추위도 환하게 웃는
후배님이 참 곱구나
후렴구로 밀려오는
오선지 겨울 파도가
신혼의 첫걸음 앞으로
흰 포말을 뿌린다
* 시 : 젊은시조문학회 작품집『팽나무 손가락』(통권 제7호, 2021)에서
* 사진 : 누린내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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