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눈물 부자 - 홍해리
내 몸이 물이었구나
내 눈이 샘이었구나
나이 들면 눈물이 흔해진다더니
보는 것 듣는 것마다 날 울리네
딸을 시집보내면서 울고
친구가 먼저 떠나가 울고
“울지 말자, 울지 말자!” 하면서도
말없이 누워 있는 사람 보며 또 우네!
♧ 늙은 소 – 홍해리
기댈 언덕 하나 없고
비빌 나무 한 그루 없는,
늙은 소야, 늙은 소야
덕석도 못 걸친 늙다리야.
배때기를 쳐라
배때기나 쳐.
노랑회장저고리 입고
노량으로 노량으로,
제 몸도 가누지 못하는 소야
그늘이 없어 영혼도 빈 소야!
♧ 세월이 약이니까 - 홍해리
철석같은 약속도
세월이 가면 바래지고 만다
네가 아니면 못 산다 해놓고
너 없어도 잘만 살고 있느니
세월 앞에 장사 없다지만
세월이 좀먹고 세월없을 때도
되는 일은 되는 세상
세월을 만나야 독이 약이 될까
색이 바래듯 물이 바래듯
세월이 약이 될까, 몰라.
♧ 죄받을 말 - 홍해리
아픈 아내 두고 먼저 거겠다는 말
앓는 아내를 두고 죽고 싶다는 말
하지 말아야 하는데
해서는 안 되는데
내가 왜 자꾸 이러는지
어쩌자고 자꾸 약해지는지
삶의 안돌이 지돌이를 지나면서
다물다물 쌓이는 가슴속 시름들
뉘게 안다미씌워서야 쓰겠는가
내가 지고 갈, 내 안고 갈 사람.
♧ 마지막 편지 - 홍해리
마음을 다 주었기로
할 말 없을까.
천금보다 더 무거운
물 든 나 뭇 잎 한 장 떨 어 진 다.
얼마나 눈부실까
내 주변만 맴돌다,
아내는 지쳤는지
다 내려놓고 나서,
마지막 가슴으로 찍는 말
무언의 ‘할말없음!’
♧ 늙마의 노래 - 홍해리
아내를 병원에 두고 돌아와
그간 입었던 땀에 전 옷을 빱니다
이 옷을 아내가 다시 입을 수 있을까
생각하니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또 입혀 줘야지 하며 빨래를 넙니다
아내의 껍질 같은 옷이 줄을 잡습니다
운동장을 가로지른 만국기처럼
하늘마당에 아내가 펄럭입니다.
* 시 : 홍해리 시선집 『마음이 지워지다』 (놀북, 2021)에서
* 사진 : 자주색달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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