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취밭목엘 가자 - 권경업
팔월, 뜨거운 날에도
시린 가슴 있다면 치밭목엘 가자
잎샘 꽃샘 일던 언덕
소중히 묻어 둔 그리움의 씨앗들
신밭골 능금알 반짝이듯 여물었을 거다
어쩌다 잃어버린 것들은
과수원 탱자 울가 아무렇게나 구를 몇 알의 낙과落果로 줍고
대竹 평상 머리 뻑뻑한 농주 두어 사발
쑥밭재 위 긴 여름 해, 한 뼘이나 더 남았을 낮술에 취하면
애타게 누군가가 보고 싶어지리라
그럴 땐 종일을 울고도 모자라는
새재마루 조릿대를 따라 실컷 울어보자
제 쫓던 반달곰에 채여 골골대던 밀렵꾼 이 아무개
지난겨울 못 넘겼다는 소문 풍편風便에 돌아
올가미 벼락틀 사라진 쑥밭재 길
식구 늘인 멧돼지 설여문 도토리 먹이려 돌아온다
우리의 깃발인 신갈 숲 흔들며
고된 다리품 뜨거운 땀방울로 푸르름 꿈꾸던 곳
낡고 초라한 산장 애잔스러이
뜬소문 하나 없이 돌아오지 않는 산친구 기다리는데
해거름, 진한 커피 한 잔과 산중정담山中情談
아련한 이의 체향體香이듯 여울지면
시린 가슴 온몸으로 적시어라
머리 웅석봉 노을, 잊혀져 가는 산노래 되어
세평 뜨락 고목 등걸 탁자를 맴돌 때
♧ 중봉 – 권경업
취밭목 뒤편
잿빛구름 드리운 하늘 아래
막 태어나는 검푸른 중봉*
유월 작달비 양수羊水로 뿌려지고
오후 내내 조개골에서
산고産苦의 천둥이 울어댔다
산사람들 한둘씩 덕담을 품고
산장으로 돌아올 때쯤
푸들푸들 물기를 털어 내는 상수리숲
노을은 산후의 핏빛에 물들었고
천지간에 용서할 것이란 없었다
가득한 사랑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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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봉 : 지리산 천왕봉 북쪽의 연봉
♧ 그곳은 - 권경업
그 곳은 우리 모든 것의 발원지
파도는 언제나 높아도 다만 출렁이지 않는 초록의 바다
갈매기의 흰 날개짓 대신
멧비둘기 바람의 길을 따라 헤엄쳐오는
고즈넉한 평화
능선을 떠다니는 원색의 천막은
산꾼의 꿈을 싣고 갈 작은 밤배
어두운 항로의 두려움보다 내일의 희망이
이물과 고물에서 수런거리고
저녁 어스름, 파도와 파도 사이로 난
작은 오솔길을 굽어보는 나는 항해사
새로 돋는 달빛, 떡갈잎에 물비늘로 휘번득거리는
이 밤의 항해 끝에 가 닿을 곳은
물길 리 수 삼천리 함께 출렁이고
하얀 포말로 밀려들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 백두라는 이름의 항구
♧ 산은 바다입니다 - 권경업
산은, 파도 밀려가고 밀려오는
푸른 숲 출렁이는 바다입니다
신갈 숲 달빛, 물비늘로 반짝이는 치밭목은
천삼백 고지高地 그 바다에 떠 있는 섬입니다
봄날 평촌리 잠녀潛女들
나물 캐는 자맥질에 넋 놓는 섬
내 어릴 때의 아쉬움 송송 솟아나
물결이 되어 밀려가고 밀려오는
아득한 그리움의 샘이 있는 섬입니다
고운 모래알로 부서지는 아침 햇살
물새 대신 찌르레기 우짖어
소녀 같은 꽃구름들 샘물 위에 재잘대며
때로는 먹장구름 억수비 쏟아지던 섬입니다
배를 타고 가다 비를 맞으면
그것도 구비진 능선에서 흠뻑 맞으면
온기 있는 가슴이 그립듯
쫓고 쫓기는 일상 속, 하루분의 분진과 소음을
정량으로 먹어대야 하는 이 도시에서
쪽배라도 타고 그 섬에 가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맑고 차디찬 그리움 길어 올려
벌컥벌컥, 말라비틀어진 이 가슴
적시고 싶습니다
♧ 작달비 - 권경업
그 여름 장기 산행은 먼지잼 한 번 없었다
악양서 출발한 남부 주능(南部主稜)
삼신봉을 넘어 거림골 샘에서도 헉헉 목이 타올라
잔돌배기 목전에서야 겨우 음양수(陰陽水)로 갈증을 풀었다
얼마나 가물었던지 혀를 빼물고 헐떡 나자빠진 장터목
천왕봉엔 인적이 끊겼다
옛 그 누구들도 그랬을, 게거품 허옇게 물고 다다른 치밭목
조개골 한참을 내려가 물을 떴지만
그곳은 우리의 세상이었다
어둠살이 찾아들면
칠월 염천도 목이 시려 모닥불 모으고
휘파람새 울 때쯤 꼬불쳐 놓은 소줏잔이 돌았다
아, 별밤 아득히 산노래 퍼져 가듯
그렇게 우리의 젊은 여름은 갔고
땀내 흠뻑 배인 뒷모습 두고 하산한 조릿대밭 사잇길
아직 누구 돌아오지 않는데
오늘 작달비 한 차례 짜든다
이 비 그치면, 안개는 중봉 비알에서
수묵 담채 그리움 아련한 산수화 한 폭 쳐 내거라
산벗의 모습 담아
*권경업의 지리산 시편 『뜨거운 것은 다 바람이 되었다』(작가마을, 2012)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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