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세상

김항신 시 '종이컵' 외 4편

김창집 2021. 7. 28. 13:36

 

종이컵

 

1.

나는 모든 걸 수용한답니다

쓰거나 달달하거나 꼬습은 것까지도

때로는 아주 뜨겁지만 차가운 것도 좋아해요

밍밍해도 괜찮고요 결국은 다 비워 낼 테니까요

그런 나를 그대는 안아줘요

두 손 살포시 감싸며 사랑하는 마음으로

당신 입 안에 넣어 내 맛을 음미해요

쓰디쓴 아픔이거나 아님 슬픔이거나 사랑이거나 그럴 때

나는 아낌없이 당신께 드려요

그런데 때로는 슬프기도 해요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 짧아 허무하답니다

좋아할 때는 쓴물 단물 다 빨아먹다

신물이 나면 헐겁기도 전에 아직 쓸 만한데

그렇게 버리는 게 아파요

어떻게 해야 우리 서로 다독다독 함께 할 수 있을까요

나는 인기도 좋은데 말입니다

호텔에서 행사장에서 초대받아 간택되기도 하니까요

한없이 친근한 벗으로 다가왔던 존재의 이유

석양 햇살에 물든

 

2.

내 책임은 아니잖아요

당신이 날 그렇게 만들었잖아요

돈에 눈이 멀었던가요

아니면요

그것까지 내가 말할 의무는 없잖아요

내 몸 둘레를 비닐로 감을 줄 누가 알 수 있겠어요

아이러니한 이 사실을 어떻게 해주길 바랄 수밖에요

 

참 이 시기에 내참 아이러니한 비닐까지

매일 입 속으로 넣고 있는 실정이라니

참 아이러니하다는 말 밖에

 

금수저 인생

 

네가 아니라서 참 다행이야

 

금수저면 뭐해

입에 물지도 못하고 찬장 속에나 있을 걸

 

아무 수저면 어째서

입에 넣을 수 있으면 좋은 거지

 

그게 뭐 대수라고 그냥, 비실댈 거 뻔한데

그래서 이대로가 좋아 건강하니까

 

그렇겠지

 

식물은 잠들지 않는다

 

식물은 잠들지 않는다

하루 내내 태양과 소통하고

하루 종일 하늘과 소통하고

 

나비와 벌과 속삭이고

웃다 찡그리다 내어주고

그러다

비를 맞고

 

밤이 되면 뒤척이며

달을 보며

별들과 속삭이며

 

새벽녘

태양이 문을 열어

기지개 펴는가 싶어

-쑥 자란 모습들

 

식물은 하루 밤낮 잠들지 않았다

 

식물은 잠들지 않는다

몸살이 하느라 바쁘다

뿌리내려 뼈대를 세우고

고고한 자태 만들어

뽐내고 싶어 정신없으니

 

아름다운 선

 

○○은행 남문지점 지하주차장

동남아 이주여성인 듯 보이는 여자

그녀의 허리 품 넉넉하다

 

저 가임의 몸

부럽다

 

은행에서 두 블록 지나

언니가 살고 있었다

우리말이 조금 서툰 새댁

베트남에서 온 그녀가

조카와 함께한 지 꽤 됐을 때

두 자녀 낳은 그 며느리도

참 예뻤다

 

새댁이었을 때

나도 저렇게 배불뚝이 된 때

신기하고

행복했고

 

아쉬웠지만

부러울 것 없었던 날

이었는데

 

꿈속 헤매는 자아

 

고립됐던 날들은 허밍 속으로 걸어가고

 

얼굴 없는 주차 딱지 무심결에 가슴에 붙어

되돌이표 되어 서성여 보지만

다른 여자 1과 다른 남자 1이 초대되어 들어온다

쌀밥 수북 차려 맞은 낯선 아파트

내 집이라 하는데

밥상에 초대되지 않은 마음

생뚱한 상위에 초대되고 싶은 심정

그는 알까

 

각설-하고

이 골목 저 골목 들어서 보지만

길 나서던 그 집, 허공만 바라볼 뿐

아뜩하게 맴돌던

낯익은 소리 생경하지 않은

살붙이였다

 

! 전생이었을까

 

 

                              *김항신 시집 라면의 힘보다 더 외로운 환희(도서출판 실천, 2021)에서

                                                  *사진 : 바다 속 풍경(산호와 고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