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권경업 시집 '자작숲 움틀 무렵'에서(1)

김창집 2021. 8. 29. 11:06

하산下山

 

중봉으로 하봉으로

장당골 조개골 써레봉으로

그 품에 뛰놀 때는, 그저

꽃 피고 새우는 줄 알았습니다

 

정향목丁香木 꽃내음과 오목눈이 지저귐이

꽃샘 잎샘 참아내던 설움일 줄은

어떤 아름다움이

숱한 아픔 볼세라 알세라 돌아서 감추시던

그 모습만 하겠습니까

 

쫓기는 지아비를 따라 쫓기다 스러진 세월

골 깊게 마디마디, 야속한 것

어디 후려치던 비바람뿐일까요

 

쉰둥이 저로 하여

보릿고개 아래 솔수펑이 송홧가루 털어먹고

허기져 눕던 어질머리 돌아앉은 세상

그래도 괜찮다 내사 괜찮다며

뼈 깎고 살 저며 내어 준 오솔길

 

철딱서니 없이 쫄랑쫄랑

평촌리 들길 지나 세상 어귀에서야

보았습니다, 그제사 보았습니다

먼빛으로 굽어보는 당신의

노을 물든 하늘 보았습니다

 

어느새 서리 내려, 하얗게 잎 지우는

당신을 보았습니다

 

치밭목

 

누군들 없으랴

지친 삶의 쓸쓸한 모퉁이

돌아앉아 가만히 되뇌어 부를

이름 하나쯤

 

너는 나의 그런 그리움이다

세상 가장 따뜻한,

 

낮달

 

낮달이 써레봉을 넘다가

중봉에 걸렸다

 

망태 장대 그냥 두어라

 

손 뻗으면 잡을 듯

재 너머 벽송사 가는 길목

 

깔깔대는

몇 안 되는 광점동 아이들 위해

 

오늘밤은, 쑥밭재로

꼬리별이나 듬뿍 떨어져라

오줌싸개들 발이 저리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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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송사 : 함양군 마천면 추성동의 절.

*쑥밭재 : 대원사에서 벽송사로 넘는 고개.

*광점동 : 쑥밭재에서 벽송사 쪽 아랫동네.

 

등산

 

오르는 것이 아니네

내려오는 것이네

굽이굽이, 두고 온 사연만큼

해거름 길어지는 산 그리메

막소주 몇 잔, 목젖 쩌르르 삼키듯

그렇게 마시는 것이네

거기 묵김치 같은 인생 몇 쪽

우적우적 씹는 것이네

지나 보면 세상사 다 그립듯

돌아 보이는 능선길

그게 즐거움이거든

 

고목古木

 

평생 바람머리 노박인 가지 많은 신갈나무

열쭝이놈 힘들어 하는 눈발 오름길

부르트고 남루한 손 내밀어

배낭 벗어 등 기대게 했습니다

 

가끔 춥다고 징징대는 날은

쫄가지 둥거리 가릴 것 없이

굽은 등 흰 허리의 제 몸 뚝뚝 분질러

모닥불 매운재로 사그라뜨린 육신肉身

그래도 일 없다 내 걱정 말거라

돌아서 보시는 앞산마루

펑펑, 설움처럼 눈[] 내리는지

어리어리, 그 눈[] 눈물 어리시는지

 

살얼음판 세상 길 돌아

또륵 또륵 또르륵 날아드는 방울새

장당골 정향목丁香木 향기 가득해도

새순이 돋지 않는 고목

어찌 그 속, 시커멓게 삭지 앉고 남아 있겠습니까

 

철딱서니 없는 것, 이제사 알았습니다

이 체온 고스란히 당신 것인 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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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향목 : 국내 자생하는 야생의 라일락.

 

춘우春雨

 

아픔이 저리도 아름답구나

쓰려다 쓰려다 남겨 논

마지막 연서戀書, 얼룩진 여백으로

조개골 산목련이 진다

 

누군들 강이 되고 싶지 않으리

머무는 듯 흘러

먼 바다 가 닿고 싶지 않으리

 

여울목 미어짐도 그 무엇도

이제는 꼭꼭 품고 갈

속 깊은 강물일 사람아

 

다리쉼하는 나루 날은 저물어

꽃 진 자리 쓰리고 쓰린

내게는 아직도 아픔이기에

 

산목련 지는 날은 겨울보다 더 춥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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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목련 : 함박꽃.

 

 

                           * 권경업 지음 자작 숲 움틀 무렵- 지리산 치밭목(명상, 1999)에서

                                             * 사진 : 여름 지리산(수채화 효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