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산下山
중봉으로 하봉으로
장당골 조개골 써레봉으로
그 품에 뛰놀 때는, 그저
꽃 피고 새우는 줄 알았습니다
정향목丁香木 꽃내음과 오목눈이 지저귐이
꽃샘 잎샘 참아내던 설움일 줄은
어떤 아름다움이
숱한 아픔 볼세라 알세라 돌아서 감추시던
그 모습만 하겠습니까
쫓기는 지아비를 따라 쫓기다 스러진 세월
골 깊게 마디마디, 야속한 것
어디 후려치던 비바람뿐일까요
쉰둥이 저로 하여
보릿고개 아래 솔수펑이 송홧가루 털어먹고
허기져 눕던 어질머리 돌아앉은 세상
그래도 괜찮다 내사 괜찮다며
뼈 깎고 살 저며 내어 준 오솔길
철딱서니 없이 쫄랑쫄랑
평촌리 들길 지나 세상 어귀에서야
보았습니다, 그제사 보았습니다
먼빛으로 굽어보는 당신의
노을 물든 하늘 보았습니다
어느새 서리 내려, 하얗게 잎 지우는
당신을 보았습니다
♧ 치밭목
누군들 없으랴
지친 삶의 쓸쓸한 모퉁이
돌아앉아 가만히 되뇌어 부를
이름 하나쯤
너는 나의 그런 그리움이다
세상 가장 따뜻한,
♧ 낮달
낮달이 써레봉을 넘다가
중봉에 걸렸다
망태 장대 그냥 두어라
손 뻗으면 잡을 듯
재 너머 벽송사 가는 길목
깔깔대는
몇 안 되는 광점동 아이들 위해
오늘밤은, 쑥밭재로
꼬리별이나 듬뿍 떨어져라
오줌싸개들 발이 저리도록
---
*벽송사 : 함양군 마천면 추성동의 절.
*쑥밭재 : 대원사에서 벽송사로 넘는 고개.
*광점동 : 쑥밭재에서 벽송사 쪽 아랫동네.
♧ 등산
오르는 것이 아니네
내려오는 것이네
굽이굽이, 두고 온 사연만큼
해거름 길어지는 산 그리메
막소주 몇 잔, 목젖 쩌르르 삼키듯
그렇게 마시는 것이네
거기 묵김치 같은 인생 몇 쪽
우적우적 씹는 것이네
지나 보면 세상사 다 그립듯
돌아 보이는 능선길
그게 즐거움이거든
♧ 고목古木
평생 바람머리 노박인 가지 많은 신갈나무
열쭝이놈 힘들어 하는 눈발 오름길
부르트고 남루한 손 내밀어
배낭 벗어 등 기대게 했습니다
가끔 춥다고 징징대는 날은
쫄가지 둥거리 가릴 것 없이
굽은 등 흰 허리의 제 몸 뚝뚝 분질러
모닥불 매운재로 사그라뜨린 육신肉身
그래도 일 없다 내 걱정 말거라
돌아서 보시는 앞산마루
펑펑, 설움처럼 눈[雪] 내리는지
어리어리, 그 눈[目] 눈물 어리시는지
살얼음판 세상 길 돌아
또륵 또륵 또르륵 날아드는 방울새
장당골 정향목丁香木 향기 가득해도
새순이 돋지 않는 고목
어찌 그 속, 시커멓게 삭지 앉고 남아 있겠습니까
철딱서니 없는 것, 이제사 알았습니다
이 체온 고스란히 당신 것인 줄
---
* 정향목 : 국내 자생하는 야생의 라일락.
♧ 춘우春雨
아픔이 저리도 아름답구나
쓰려다 쓰려다 남겨 논
마지막 연서戀書, 얼룩진 여백으로
조개골 산목련이 진다
누군들 강이 되고 싶지 않으리
머무는 듯 흘러
먼 바다 가 닿고 싶지 않으리
여울목 미어짐도 그 무엇도
이제는 꼭꼭 품고 갈
속 깊은 강물일 사람아
다리쉼하는 나루 날은 저물어
꽃 진 자리 쓰리고 쓰린
내게는 아직도 아픔이기에
산목련 지는 날은 겨울보다 더 춥다
---
*산목련 : 함박꽃.
* 권경업 지음 『자작 숲 움틀 무렵』- 지리산 치밭목(명상, 1999)에서
* 사진 : 여름 지리산(수채화 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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