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고정국 시집 '진눈개비'의 시(2)

김창집 2021. 8. 31. 00:04

일출봉日出峯을 내려오며

 

 

섬 끝 물굽이에

깎일 것 다 깎이고

 

돌아서면 가슴에 안겨

흐느끼는 신양리新陽里 바다

 

흐름도

낙일落日에 맡기랴

을 두지 못하네.

 

성냥개비

 

 

한 올 빗줄기야

남겨서 좋으려니

 

짙푸른 눈을 뜨고

사위는 목숨이여

 

환생還生

그대 연못에

오래 피는 연이고 싶다.

 

소리개

 

 

아득해 보일수록

마음 더욱 가는 것이,

 

먼 데서 들을수록

사무침만 오는 것이

 

어느 뉘 원혼冤魂에 우랴

삐이요르르르 삐이이요르르르.

 

 

땅에서 저지른 일이

하늘에 가 닿았을까.

 

골짜기로 흐르다가

산정山頂으로 치솟다가

 

구천을 맴도는 새야

삐이요르르르 삐이이요르르르.

 

 

혼자서 지은 죄

혼자서만 뉘우치다

 

억새밭 노을이 지면

바람처럼 가는 새야

 

세상사 탄식歎息뿐이랴

삐이요르르르 삐이이요르르르.

 

 

금기禁忌 범한 사람들이

얼굴 들기 송구한 날

 

네 울다 떠난 자리

하늘 더욱 붉은 것도

 

임종臨終이 먼 데 있으랴

삐이요르르르 삐이이요르르르.

 

 

내일은 어느 등성이

구름결에 몰리다가

 

날개짓 서러워지면

허공에다 획을 긋고

 

단죄斷罪도 하늘에 맡기랴

삐이요르르르 삐이이요르르르.

 

시월에

 

 

시월엔 나무가 되랴

그 성그는 숲으로 가라

 

물빛 하늘 우러러

낙엽落葉을 준비하고

 

노을에

산창山窓을 열고

저녁불도 지피랴.

 

 

 

한 세상 사는 것이

다 길이라 하는 것을.

 

물빛 글썽이는

만 보고 가노라면

 

세월歲月

소롯길로 와서

억새꽃을 피웠네.

 

 

노을녘 산마루엔

하늘만한 뉘우침이

 

웃자란 억새밭에

하얗게 눕던 날은

 

길 잃은

조랑말 한 마리

을 향해 울었다

 

 

반평생 구빗길을

먼발치로 따라와서

 

때로는 이맛섭에

주린 듯 돋는 별빛

 

그 순명順命

비포장길에서

삐걱이는 내 수레여.

 

 

                                              *고정국 시집 진눈개비(도서출판 서울, 1990)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