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문태준 시집 '가재미'의 시들(2)

김창집 2021. 9. 1. 00:11

 

아파트 18층에 누워 살면서 밤은 꿈도 없이 슴슴해졌다

소꿈은 길한 꿈이라는데 뜨막하게 소꿈을 꾸는 때가 기중 좋다

내 소꿈은 소와 자꾸 싸우는 소꿈이다

내 걸음걸이는 얼른얼른 어딜 가자는 것 같고

소는 또 그럴 생각 없이 머뭇거리고 목을 젖혀 뻣뻣하게 버틴다

간혹 혀를 빼 누런 소가 길게 울기도 한다

들에서 돌아오는 아버지를 마중 나가 아버지로부터 받아오던 그 소와 아주 닮았다

내 소꿈은 소와 자꾸 싸우는 소꿈이어도

소꿈을 꾸는 날에는 하루가 빈 걸상도 있고 악기점도 있고 아무도 걸어가지 않은 길이 수유리까지 멀리 나 있다

 

이상한 화병花甁

 

유행하던 부처는 한 나무 아래 오래 머물지 않았는데

너는 이 세상 어디를 돌고 돌아 마음을 쉬게 할까

나는 벌써 한곳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임을 쓸쓸하게 예감한다

둠벙 같은 그곳에서 서서히 나의 부패가 시작되리라는 것을 예감한다

나는 오늘 꽃이 꽂혀 있는 화병을 골똘히 보고 있다

쳐진 그물에 물고기가 갇히듯이 화병에 갇힌 꽃은

죽은 물고기의 마른 비늘이 물속으로 되돌아간 것 같다

어깨는 주저앉고 두 눈동자는 벽처럼 얼이 없다

꽃의 얼굴은 목탄 그림처럼 어두워졌다

화병은 하루 안에도 새 꽃을 묵은 꽃으로 만드는 재주가 있다

화병은 서 있는 그 자리에서 내가 시드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평상이 있는 국숫집

 

평상이 있는 국숫집에 갔다

붐비는 국숫집은 삼거리 슈퍼 같다

평상에 마주 앉은 사람들

세월 넘어온 친정 오빠들 서로 만난 것 같다

국수가 찬물에 헹궈져 건져 올려지는 동안

쯧쯧쯧쯧 쯧쯧쯧쯧,

손이 손을 잡는 말

눈이 눈을 쓸어주는 말

병실에서 온 사람도 있다

식당 일을 손 놓고 온 사람도 있다

사람들은 평상에만 마주 앉아도

마주 앉은 사람보다 먼저 더 서럽다

세상에 이런 짧은 말이 있어서

세상에 이런 깊은 말이 있어서

국수가 찬물에 헹궈져 건져 올려지는 동안

쯧쯧쯧쯧 쯧쯧쯧쯧,

큰 푸조나무 아래 우리는

모처럼 평상에 마주 앉아서

 

낮달의 비유

 

내 목숨이 서서히 무너지고 싶은 곳

 

멀리서 온 물컹물컹한 소포

엷은 창호문과 성글은 울

찬물 한 그릇이 있는 마루

꽃도 새도 사람도

물보다 물렁하게 쥐었다 놓는,

식었던 아궁이가 잠깐만 환한,

 

내 귓속에 맑게 흐르는 이별의 말

자루에서 겨처럼 쏟아져 내리다 흰빛이 된 말

 

무늬는 오래 지닐 것이 못 되어요

 

무늬는 오래 지닐 것이 못 되어요

시골 오일장이 서는 날에는 집짐승이 서로 사고 팔리는 날에는

흰 개에 대한 오해가 있어서 장날 食前에 먹을 갈아

먹물을 흰 개 몸에 발라 큰 얼룩을 만드는 집이 어려선 있었지요

흰 개를 검은 개로 반절은 만들어 옥시글거리는 장에다 내었지요

흰 개는 배가 가렵다고 흙바닥에 기고 뒹굴고 뒷발로 옆구리의 무늬를 긁어대었겠지요

그 무늬가 어떻게 되었겠어요

용케 개의 배를 손바닥으로 슥슥 문질러보고 값을 쳐주는 약삭빠른 장사치가 있었다지만

흰 개가 가난한 식구의 밥그릇을 빼앗아 간다는 오해도 하나의 무늬여서

알고도 모르는 척 속은 척 받아넘기는 것이 무늬이었지요

개칠한 무늬는 보기만 해도 우습지만 무늬는 크게 쓸어내릴 것이 못 되었지요

무늬는 오래 지닐 것이 못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지요

 

 

                                    * 문태준 시집 가재미(문학과 지성사, 2006)에서

                                                       * 사진 : 붉은사철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