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우리詩' 2021년 9월 399호 발간

김창집 2021. 9. 3. 01:25

 

극장에서 정순영

 

붉은 립스틱을 바른 입술로

공정을 말하고

평등을 말하고

정의를 흉내 내는 걸음걸이로 무대를 오가는

 

다소곳이 속임을 여민 어느 배우가

세금 주머니를 들고 백성의 호주머니를 털어

객석이 어두워지니

 

무대의 막은 누구를 위해 오르는가?

 

 

녹음유초승화시綠陰幽草勝花時 - 임채우

 

명옥헌 원림 배롱나무들이 꽃망울을 터뜨리자

천상을 향해 퍼덕이는 붉은 나비 떼

떠나려는 것들을 붙잡기가 버거워

묵직한 천년 기왓장으로 누르고 있다

세상천지 저승길 같은 녹음과

나비들의 떼 비상 아래

숲 그늘로 꼬리를 감추는

산길 초입

들꽃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아롱아롱 여심 하나

 

 

하늘 김종욱

 

청아한 청수정 빛나는 색채

모네가 그린 푸른 빛,

장님이 처음 눈을 뜨게 되었을 때

바라볼 수 있는 파랗고 좋은 나라를 그리고 싶어

빛의 반사로 피어난 푸른 꽃잎을

마르지 않는 눈물로 흘리고 싶어

 

이 파란 슬픔이여 영원하라

밤 돼도 푸르스름한 별 숲으로 다시 태어나라

나도 조금 파랗게 취해서

술꾼의 별에 사는 술꾼처럼 괴로워하고 있다

완벽하게 취하면 죽을 수 있을 텐데

저 푸른 술독에 빠질 수 있을 텐데

 

푸름히 빛나는 은하수 물결에 휩쓸려

맑은 물소리로부터 너의 목소리 들으며

하늘이라는 바닷속

밑바닥까지 가라앉아 버릴 텐데

 

 

시집 짓기 - 여연

 

요즘 시인이 너무 많다

개나 소나 시인이다

 

이런 말 들을 때마다

발이 저린다

 

누군가 애써 지은 집

다 읽지도 못하고

서가에 쌓이는 것 보면

내가 지은 집도 그러할 텐데

 

오늘 또 집 짓겠다고

부스러기 하나하나 주워 모으다가

나는 시인인가

나는 시인하는가

 

물음하나 서까래로 올리려 한다

 

 

말뚝 - 박덕은

 

바다를 밧줄로 휘감고

조여 오는 비바람에

투두둑 끊어질 듯 차가워진

아버지의 한숨

 

나이테로 고여 들며

물기 많은 자국으로

번진다

 

부르르 떠는 줄 잡아당기자

어린 자식들이 주르룩 딸려 나와

졸음과 짜증에 절은 뱃속도 잊은 채

갯내음 터뜨린다

 

하얀 칼끝 밀어 넣는

풍랑에 쫒길수록 일어서는 뱃노래

재갈 같은 생과 맞선다

 

한자리에 붙박여

짠내 나는 맷집 키운 후

타오르지 못한 물길 조금씩 연다

 

뒤집어엎겠다는 듯

앞발 치켜든 파도 소리

똬리 틀어도

등에 힘을 주며

만선의 저녁 둘러멘다

 

팽팽하게 외줄 친

수평선 끝에서 노을이 풀리자

어스름처럼 한평생 속이 다 타 버린

빈몸 하나 둥글게 깊어진다

 

개펄에 스스로를 묶어

기꺼이 검게 박힌 기둥

비릿한 달빛의 여린 부리

닦아 주고 있다.

 

 

                                                * 월간 우리202109399호에서

                                                         * 사진 : 여름새우난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