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문충성 시 '절망을 위하여' 외 5편

김창집 2021. 9. 4. 00:12

절망을 위하여

 

헛된 행복 뒤에 오는 기쁨을 믿지 말라

하루가 가고 한 달이 지나

보아라 기쁨은 우리를 그냥 두지 않는다

갈가리 찢어놓으니 우리의 그리움

비참하게 고뇌의 벼랑으로 떨어지는

끝에 매달려 힘 못 쓰는 우리들아

결코 눈감지 말라

마침내 망각의 강물에 떨어져 그 강물

아무리 깊어도 미련하게 익사하지 말라

강물의 깊이는 원래 흘러감으로 없는 것이다

만남과 헤어짐의 부질없음이여 속임수, 사랑,

미움, 간교함, 자기기만으로 더 거세어진 강물에서

숨막히며 허우적거리다 거의거의 살아나면

삶과 죽음의 없음 깨달을 때

우리에겐 꿈꿀게 과연 없는 것일까?

비로소 우리들아

두 하늘 가득 차오는 달콤한 절망 꿈꾸게 될

그날은?

 

편지便紙

 

섬 하나 태평양으로 떠나갈 듯

천지가 시커멓게

거센 바람 불고 심장조차

새하얗게 얼어붙게 눈이

쏟아지고 창문이

집채만한 파도 일듯

흔들립니다 어머니

그곳에도 눈보라칩니까

춥습니다 추우시면

여름철 러닝셔츠라도 하나 더

껴입으십시오 조금씩

뜨거워진다지만 이 세상은

살아도살아도 조금씩

더 캄캄해집니다 언제면

눈부신 대낮 한번 살겠습니까

우리 식구들은 저녁 먹고

TV 앞에 둘러앉아

홍성원의 먼동을 보고 있습니다

아무리 뒤돌아보아도 부끄러울 뿐입니다 어머니

 

우울 · 1

 

누렇게 녹슬어가는 슬픔이 세계의 끝에서

오고 중얼중얼

꽃잎 지듯 망각의 저편

그림자 하나

비어가고 쓸쓸히

오늘도 이마에 드리워진

머리칼 침침하게 끔뻑끔뻑

저물어드는 기억의 하이얀 길들

이미 목숨 속에 뻥 뚫린 하늘 구멍

날아오르는 까악까악

까마귀 한 마리

하늘 구멍 지우며 시커멓게

 

부끄러운 날

 

누가 5월은 푸르다 했는가 비지땀만

흘러내려 노랗구나 세상은

화안히 밝은데 똥개들 다니는 거리

주인들도 다니지만 한 마리 똥개도

없는 자 부끄러워라 사철탕

오리탕, 토끼탕까지 한탕 두탕

부지런히 들락이며 돈 모으기

때로 권세 부리기 무섭게

5천억, 1조 원도 더 만들어내는 이들 있어

놀라워라 미쳐야 정상일까 오로지

술자리에 들면 한잔 술도 못 마시고

노래방에 들면 희망가나 겨우 불러

똥친 막대꼴 되어

새로 유행하는 신나는 분위기 망쳐놓으며

부끄러워라 비슷비슷한 시나 쓰며

위대한 독자들 비웃음 받으며 어쩌면

그 비웃음조차 받지 못하며

밥벌이 글쓰기 위해 보들레르나 불쌍하게 뒤적이며

그래 조금 더 죽음 가까이에서

드뷔시의 목신의 오후에는 전주곡이나 듣자니

참으로 부끄러운 날

가족들 외식 한번 못 시켜주는

차는 있어도 드라이브 한번 못 시켜주는

아비의 못난 얼굴을 처음 본 날

 

하루

 

개밥 먹는 사람에게 하루란 얼마나 캄캄한 것일까

꿈은 캄캄한 새벽 떠나서 아직도 돌아올 줄 모른다

새벽은 어디쯤 나앉아 꿈을 기다리며 저물고 있을까

기다림으로 하루를 사는 사람에게는 하루 일이 얼마나 미친 짓일까

기다림은 기다리는 사람에게 미약에 지나지 않느니

그것이 속임수 그놈일 것을 알건만

지는 해, 길 잃은 새벽, , 기다림을 기다리느니

차가운 발걸음들

 

꽃 노래

 

처음 너는 자그마한 눈짓이었네 나풀나풀

이른 봄 햇살 풀리는 물아지랑이

그 눈짓 네 눈 속에서 자라나

보랏빛 색깔 고르고 보랏빛 향기 고르고 무심무심

불어오는 바람에 한잎 두잎 슬픔의 그림자 치우곤 했네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때로 너는 허무였네 그러나

존재의 어두운 계단 뚜벅뚜벅

걸어 다니며 살아 있음의 고통

짖어대며 끊임없이

피멍 드는 혼 깊숙이

온통 뿌리째 나를 뒤흔들어놓았네

50년이 걸렸네 바보같이

그것이 그리움인 줄 아는데

안팎으론 눈보라치는데

 

                          * 문충성 시집 바닷가에서 보낸 한 철(문학과지성사, 1997)에서

                                       * 사진 : 제주 여름 한 철 바닷가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