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권경업 시 '그리움 앞세워' 외 5편

김창집 2021. 9. 5. 00:25

그리움 앞세워

 

핏기 없는 하늘 조금씩 나누어 품고

가을을 앞세워 새재를 넘자

 

가다 보면 어느새 품안엔 솔솔바람, 그 바람 줄곧

평촌리 들녘 쫓아오던 세속世俗 것인 줄 알겠지만

 

지금은, 고향 떠나 어느 먼 도시

쉬 중년을 넘겨 낯설게 늙어 갈

어느 소녀의 눈빛 같은 조개골

둥둥 걷는 그리움의 맨종아리로 건너면

까치발 발돋움으로, 혹여

아쉽게 떠나보낸 봄날이 저만치

연분홍 연둣빛 아름다운 날들이 저만치

 

목을 빼 바라보는 장당골 굴참나무 숲

어디선가, 후두둑 여문 도토리 떨어뜨리는

산죽山竹밭 맑은 댓바람 있으니

하산한 뒤 다시 그 가슴으로 하늘 짜 맞춘다면

세상 온통 싱그럽지 않을까

 

여보게, 그런 새재를 넘어 보지 않을래

아득한 그리움에 다가가려면

가을을 앞세워 가야 한다기

 

고추잠자리

 

신밭골 하늘 맑은 것은

고추잠자리들, 고 작은

그물 같은 날개 파닥여

해 질 무렵까지

제 몫의 세상 거른 때문이네

 

그러고도 기특한 것은

날개 접어 쉬는 곳이, 기껏

마른 고춧대 끝이나

흔들리는 쑥부쟁이 대궁 아니면

능금밭 탱자 울 가시 위 잠깐이야

자기에게는, 오직

땅 위 발 디딜 곳이면 족하다는 거야

 

날아다니는 놈이, 무슨

넓은 곳 필요하냐는 거지

, ,

 

장당골 추색(秋色)

 

오죽 속이 타면 저러랴

지랄 방광 환장한 듯

바락바락 악을 쓴다

얼룽덜룽 채진 것이

원도 많고 한도 많다

신끼[神氣]가 들었는가

북채를 잡아라 징 울려라

 

살풀이 춤판으로

이 땅 응어리 풀

강신무가 되어라

곰비임비 경사 부를

만신이가 되어라

내림굿판 벌여 보자

걸차게 벌여 보자

 

어화둥둥 신 내리소

장당골에 신 내리소

단군 할배 오실라요

최영 장군 오실라요

대주大主님들 어서 오소

노고할미 삼신할미

저다지도 고운 얼굴

마른버짐 피기 전에

북녘 대신 남녘 대신

백두 장군 한라 장군

모두들 어서 오소

 

이 산자락 서럽게

죽어 갔던 영가님들

질펀하게 더덩실

굿판에 어울리소

어허 숨차 어허 숨차

장당골에 신 내린다

 

애달프다 사람들아

불구경하듯 보지 말고

누가 나서서

냉수라도 한 사발

떠다 주소

 

새잿마루

 

어쩜 저리 맑은 것이

예전, 어느 눈빛 같아

 

부끄러워라

내쉬는 내 숨

 

그리운 이름

 

내가 아는 어느 이름

자간字間과 자간에는

바라보기 아쉬운 하늘이 있다

어디선가 마른 상수리 숲 내음이 나고

무리지어 길 떠나는 방울새

그 뒤를 따라 시퍼렇게 물들어가는 그리움

 

다시는 가지 말아야지

가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아득히 그 하늘 건너가는

나는 억새꽃, 하얀 바람

바람이구나

 

등불

 

지치고 허기진

길 없는 내 그리움의 길

막막한 그 길의 끝, 해는 저물어

세상 가장 아름다운 등불로 서 있을 사람아

사랑은 아픈 것이 아니라

지신을 태워가며 아파하는 것

이제, 이 어둠의 끝이 오면

새벽 곤한 길 깨워 함께 가자

너의 아픔 내가 아파하며

새벽길 깨워 우리 함께 가자

 

 

                                  * 권경업 지음 자작 숲 움틀 무렵- 지리산 치밭목(명상, 1999)에서

                                                              * 사진 : 지리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