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움 앞세워
핏기 없는 하늘 조금씩 나누어 품고
가을을 앞세워 새재를 넘자
가다 보면 어느새 품안엔 솔솔바람, 그 바람 줄곧
평촌리 들녘 쫓아오던 세속世俗 것인 줄 알겠지만
지금은, 고향 떠나 어느 먼 도시
쉬 중년을 넘겨 낯설게 늙어 갈
어느 소녀의 눈빛 같은 조개골
둥둥 걷는 그리움의 맨종아리로 건너면
까치발 발돋움으로, 혹여
아쉽게 떠나보낸 봄날이 저만치
연분홍 연둣빛 아름다운 날들이 저만치
목을 빼 바라보는 장당골 굴참나무 숲
어디선가, 후두둑 여문 도토리 떨어뜨리는
산죽山竹밭 맑은 댓바람 있으니
하산한 뒤 다시 그 가슴으로 하늘 짜 맞춘다면
세상 온통 싱그럽지 않을까
여보게, 그런 새재를 넘어 보지 않을래
아득한 그리움에 다가가려면
가을을 앞세워 가야 한다기
♧ 고추잠자리
신밭골 하늘 맑은 것은
고추잠자리들, 고 작은
그물 같은 날개 파닥여
해 질 무렵까지
제 몫의 세상 거른 때문이네
그러고도 기특한 것은
날개 접어 쉬는 곳이, 기껏
마른 고춧대 끝이나
흔들리는 쑥부쟁이 대궁 아니면
능금밭 탱자 울 가시 위 잠깐이야
자기에게는, 오직
땅 위 발 디딜 곳이면 족하다는 거야
날아다니는 놈이, 무슨
넓은 곳 필요하냐는 거지
허, 거, 참
♧ 장당골 추색(秋色)
오죽 속이 타면 저러랴
지랄 방광 환장한 듯
바락바락 악을 쓴다
얼룽덜룽 채진 것이
원도 많고 한도 많다
신끼[神氣]가 들었는가
북채를 잡아라 징 울려라
살풀이 춤판으로
이 땅 응어리 풀
강신무가 되어라
곰비임비 경사 부를
만신이가 되어라
내림굿판 벌여 보자
걸차게 벌여 보자
어화둥둥 신 내리소
장당골에 신 내리소
단군 할배 오실라요
최영 장군 오실라요
대주大主님들 어서 오소
노고할미 삼신할미
저다지도 고운 얼굴
마른버짐 피기 전에
북녘 대신 남녘 대신
백두 장군 한라 장군
모두들 어서 오소
이 산자락 서럽게
죽어 갔던 영가님들
질펀하게 더덩실
굿판에 어울리소
어허 숨차 어허 숨차
장당골에 신 내린다
애달프다 사람들아
불구경하듯 보지 말고
누가 나서서
냉수라도 한 사발
떠다 주소
♧ 새잿마루
어쩜 저리 맑은 것이
예전, 어느 눈빛 같아
부끄러워라
내쉬는 내 숨
♧ 그리운 이름
내가 아는 어느 이름
자간字間과 자간에는
바라보기 아쉬운 하늘이 있다
어디선가 마른 상수리 숲 내음이 나고
무리지어 길 떠나는 방울새
그 뒤를 따라 시퍼렇게 물들어가는 그리움
다시는 가지 말아야지
가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아득히 그 하늘 건너가는
나는 억새꽃, 하얀 바람
바람이구나
♧ 등불
지치고 허기진
길 없는 내 그리움의 길
막막한 그 길의 끝, 해는 저물어
세상 가장 아름다운 등불로 서 있을 사람아
사랑은 아픈 것이 아니라
지신을 태워가며 아파하는 것
이제, 이 어둠의 끝이 오면
새벽 곤한 길 깨워 함께 가자
너의 아픔 내가 아파하며
새벽길 깨워 우리 함께 가자
* 권경업 지음 『자작 숲 움틀 무렵』 - 지리산 치밭목(명상, 1999)에서
* 사진 : 지리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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