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만치
고내오름 새벽 산정에
바닷바람이 비릿하다
저만치
남녘으로 유순한 무덤들
원망도 미움도 벗어놓고
어제 이사 온 이웃의 이야기로
날이 새는 줄을 모른다
저만치
산 아래 바닷가에 붙박인
조개껍질 같은 삶은 고달파도
하늘보다 많은 별들이 깜박인다
저만치
통통배 밤새 조업에
통 통 통 통
만성피로를 싣고 온다
저만치
도두봉* 너머로
어둠을 밀어내는 붉은 해
한 아름 애드벌룬을 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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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두봉 : 제주시 도두 바다에 인접한 오름.
♧ 그리하여
그리하여 오늘은
나의 운명, 눈빛을 마주하여
어제를 보내고 쓸쓸한 오늘
한 편의 시를 읽으며 내일 또
오늘을 기다리기로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내일은
영영 오지 않는 꿈
날마다 잊히면서
그리움마저 무너지고
버티던 날들의 허무한 노래
그리하여 나는
아무도 낭송하지 않는 시
길가에 지는 꽃잎에 비가 내리고
가슴에 남은 그리움으로
천상병의 노을이나 새기다가
그리하여
바람 좋은 날
기억의 먼지라도 없는 날
고향 길에 하얀 민들레를 날리며
당신의 시 한 편을 탈고하리라 하오니
♧ 저녁 한때
해를 삼킨 바다는 보아뱀의 눈처럼 이글거리고
기다려줄 만큼 서서히 번져가는
어둠, 그 은근한 예의 바른 초대에
풍경으로 앉아 저무는 것도 좋은 일
불청객 바람은 젓가락도 없이 꺼덕꺼덕
흔들의자를 흔들어대며 조르고
심심하던 어린 매화는 킬킬거리고
한여름 무화과 넓은 잎은
잘 익은 향기를 부채질하는데
배부르게 잘 먹은 동박새 가족은
인사도 없이 하르르 떠나고
직박구리 부부도 후루루 떠나고
들꿩소리 번져가는 적막
바람도 서둘러 떠나고 나면
어둠보다 더 짙게 드리우는 그리움
하늘 끝으로 작은 새의 여운이 길다
♧ 붉은 꽃
다만 너는
나의 기쁨
감추어둔 첫 이름
몰래 웃었지
다만 너는
나의 비애
인적 없는 들길에
혼자 부르는 노래
다만 너는
나만의 고독
안개 낀 바다에
쓸쓸한 무적
네 붉음 다하여
피는 꽃
♧ 거룩한 분노
-주술 6
작은 빛, 촛불이여,
네 앞에 나는
한 없이 작고 부끄럽구나
촛불이 흐르는 거리 어디서
짤랑짤랑 방울을 흔들며
음습한 목소리가 들린다
‘사탄은 증오를 낳고……’
벌떼처럼 춤을 추는 촛불
그 탁류의 범람 속으로
나는 없고, 아무도 없다
다만 휩쓸리어 흐르는 맹목
촛불이 흐르는 어디서
둥강 둥강 무당의 굿소리
‘증오는 증오의 손자를 낳고……’
소용돌이치는 태풍의 눈,
바람 한 점 들지 않는 밀실에서
미소를 흘리는 실루엣이여!
무도한 강간으로 동강난
아, 부끄러운 우리 어머니,
이제 팔다리 각을 떠서
사탄의 제단에 번제를 드리려 하는가?
그적 붉은 쓰나미, 은밀히 버텨온 70년
최후의 휘슬의 순간을 기다리는가
거룩한 분노*는 고요히
땅속 깊은 불길로 끓고 있나니
겨레의 성산에 천 길 높이로 치솟아
동방의 밝은 빛*, 강산을 밝히리니
그날을 위하여
나를 닫고 손을 모아
외로운 촛불을 밝히느니
---
*거룩한 분노: 변영로의 시 ‘논개’에서.
*동방의 밝은 빛: 타고르의 시에서.
♧ 누가 돌을 던지나
“쨍그랑?!”
온몸에 꽂히는 비명
핏방울이 사방으로 튀고
내가 산산조각이 난다
*김종호 시집 『잃어버린 신발』 (푸른시인선 023, 2021)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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