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김종호 시 '저만치' 외 5편

김창집 2021. 9. 6. 01:35

저만치

 

고내오름 새벽 산정에

바닷바람이 비릿하다

 

저만치

남녘으로 유순한 무덤들

원망도 미움도 벗어놓고

어제 이사 온 이웃의 이야기로

날이 새는 줄을 모른다

 

저만치

산 아래 바닷가에 붙박인

조개껍질 같은 삶은 고달파도

하늘보다 많은 별들이 깜박인다

 

저만치

통통배 밤새 조업에

통 통 통 통

만성피로를 싣고 온다

 

저만치

도두봉* 너머로

어둠을 밀어내는 붉은 해

한 아름 애드벌룬을 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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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두봉 : 제주시 도두 바다에 인접한 오름.

 

그리하여

 

그리하여 오늘은

나의 운명, 눈빛을 마주하여

어제를 보내고 쓸쓸한 오늘

한 편의 시를 읽으며 내일 또

오늘을 기다리기로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내일은

영영 오지 않는 꿈

날마다 잊히면서

그리움마저 무너지고

버티던 날들의 허무한 노래

 

그리하여 나는

아무도 낭송하지 않는 시

길가에 지는 꽃잎에 비가 내리고

가슴에 남은 그리움으로

천상병의 노을이나 새기다가

 

그리하여

바람 좋은 날

기억의 먼지라도 없는 날

고향 길에 하얀 민들레를 날리며

당신의 시 한 편을 탈고하리라 하오니

 

저녁 한때

 

해를 삼킨 바다는 보아뱀의 눈처럼 이글거리고

기다려줄 만큼 서서히 번져가는

어둠, 그 은근한 예의 바른 초대에

풍경으로 앉아 저무는 것도 좋은 일

불청객 바람은 젓가락도 없이 꺼덕꺼덕

흔들의자를 흔들어대며 조르고

심심하던 어린 매화는 킬킬거리고

한여름 무화과 넓은 잎은

잘 익은 향기를 부채질하는데

배부르게 잘 먹은 동박새 가족은

인사도 없이 하르르 떠나고

직박구리 부부도 후루루 떠나고

들꿩소리 번져가는 적막

바람도 서둘러 떠나고 나면

어둠보다 더 짙게 드리우는 그리움

하늘 끝으로 작은 새의 여운이 길다

 

붉은 꽃

 

다만 너는

나의 기쁨

 

감추어둔 첫 이름

몰래 웃었지

 

다만 너는

나의 비애

 

인적 없는 들길에

혼자 부르는 노래

 

다만 너는

나만의 고독

 

안개 낀 바다에

쓸쓸한 무적

 

네 붉음 다하여

피는 꽃

 

거룩한 분노

   -주술 6

 

작은 빛, 촛불이여,

네 앞에 나는

한 없이 작고 부끄럽구나

 

촛불이 흐르는 거리 어디서

짤랑짤랑 방울을 흔들며

음습한 목소리가 들린다

 

사탄은 증오를 낳고……

 

벌떼처럼 춤을 추는 촛불

그 탁류의 범람 속으로

나는 없고, 아무도 없다

다만 휩쓸리어 흐르는 맹목

 

촛불이 흐르는 어디서

둥강 둥강 무당의 굿소리

 

증오는 증오의 손자를 낳고……

 

소용돌이치는 태풍의 눈,

바람 한 점 들지 않는 밀실에서

미소를 흘리는 실루엣이여!

 

무도한 강간으로 동강난

, 부끄러운 우리 어머니,

이제 팔다리 각을 떠서

사탄의 제단에 번제를 드리려 하는가?

그적 붉은 쓰나미, 은밀히 버텨온 70

최후의 휘슬의 순간을 기다리는가

 

거룩한 분노*는 고요히

땅속 깊은 불길로 끓고 있나니

겨레의 성산에 천 길 높이로 치솟아

동방의 밝은 빛*, 강산을 밝히리니

그날을 위하여

나를 닫고 손을 모아

외로운 촛불을 밝히느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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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분노: 변영로의 시 논개에서.

*동방의 밝은 빛: 타고르의 시에서.

 

누가 돌을 던지나

 

쨍그랑?!”

 

온몸에 꽂히는 비명

 

핏방울이 사방으로 튀고

 

내가 산산조각이 난다

 

 

                                  *김종호 시집 잃어버린 신발(푸른시인선 023, 2021)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