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혼과 바이올린 소리 사이로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경계
판노니아 평원이 새로운 판을 짠다
산이 나와 길을 내고 길을 막고
산은 언제나 가장 큰 길의 주인
무슨 볼 일 보고 가나?
도나우 강이
황혼과 바이올린 사이로
도시를 빠져나간다
사라지지 않으려 사라지는 하루가
게으른 생각처럼 산허리를 넘는다
누군가
살짝 건드려 놓은 대왕조개처럼
하루가 문을 닫는다
♧ 길을 낳는 조약돌
산길 걷다 만난 조약돌 하나
선사시대 왕이 쓰던 인장
원시시대 공주가 쓴 사랑 편지 마침표
인주를 묻혀 허공에 찍어본다
허공 백지에 길이 선명하게 찍혔다
길을 더 낳으라고 야생의 길에 풀어주었다
♧ 산
흐린 날은 구름 타고
하늘 한 번 다녀오고
맑은 날은
사람 등 타고
마을 한 번 다녀온다
산에 살던 산신령들은
사람들이
그들 집에
집을 자꾸 지어대자
아주,
하늘로 이사를 갔나 보다
소식도 없다
♧ 도봉, 반나절 공연하다
해나다 비오는 정오
산은 막 내린 극장
사람들이 끝없이 나온다
오늘은 토요일
산도 반나절은 쉬고 싶나 보다
늦게 온 사람들은
뒤풀이로 풀려 나오는 산물에 아쉬움 품고
“이화우 흩뿌릴 제”
매창 시비* 거문고 가락에
흥 한 번 얼씨구 타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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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산 입구의 매창 시비
♧ 바텐더가 있는 풍경
바텐더가 섞임의 춤을 춘다
화가가 섞은 색이 그림 속에 웃고 있다
섞인 음들이 음악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낮이 밤으로 들어간 저녁이
출입문이 여닫힐 때마다
안팎을 드나든다
서로 드나드는 시간,
사랑을 만드는
여자와 남자가
웃음 속에 들어가 섞이고 있다
넘친 술이 볼 위의 빨강으로 번지고 있다
* 계간 『산림문학』 2021년 가을호(통권 43호)에서
* 사진 : 숲산의 가을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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