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김영흥 유고시집 '하늘에서 부르는 출석부'의 시(1)

김창집 2021. 10. 7. 00:14

*제주의 아름다운 밭담들입니다.

서시序詩

    -출석부

 

나는 늘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들릴 듯 말 듯 출석을 불렀지요

번호 아니면 이름

여간 해서는 대답 못할 정도의

작은 목소리는 학생들을 긴장시키고

당나귀처럼 쫑긋 세운 귀와 눈을

보는 것은 즐거움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느님이

날 부르는 뚜렷한 소리

나는 들었습니다.

 

십리라면 고작 절반을 걸은

어느 지점에서 시간의 한 끝을 보며

두 손을 비비며 건널 수 없는

심연 앞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누구나 다 부르면 대답해야 하거늘

치열처럼 가즈런한 숱한 이름들 중에

하필이면 나를 먼저 불러주시다니

나는 두렵습니다.

 

사는 게 외줄타기라고 하던가

출렁거리는 줄을 잡고 조금씩 앞으로

기어가는 시간은 엄숙합니다.

 

지금 와서 문득 사랑이 귀중함을 깨달아

지나간 날을 돌아보며 가슴을 칩니다.

 

내가 불렀던 그 많은 이름들

옷깃을 스쳤던 사람들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 주고 싶은 것이

꿈이었는데 이제 흔들리는 등불

절단된 시간 앞에 이렇게 몸부림칩니다.

 

왜 나는 하느님이

너는 무엇을 하고 있느냐물으면

저는 지금 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할 사람이

되지 못했는가

왜 나는 떨고 있는가?

 

살아있는 시간은 어떻게 흐르는가

나는 한 번도 그것을 본 일이 없다.

 

있는 것은 그냥 있게 하옵시고

없는 것은 그냥 없게 하옵시면

끝이 있다는 것은

경의로 다가서고

 

신비로운 만남을 통하여

생명불 켜고 생각하는 사람을 위해

허여된 낮과 밤의 두 얼굴

 

찾아드는 시간에

기름을 부으며

고무줄처럼 늘려

를 쓰고 다듬을 것입니다.

 

하느님이시여

내가 하는 짓을 용서하소서

부질없는 삶의 이력서

 

아침 이미지

 

꽃들은 아슴푸레

제자리로 일어서고

 

아기새 포롱포롱

하늘을 차오르면

 

별들은 말곳말곳이

속삭이다 갔습니다

 

이리하여 지상엔

생명의 잔치 열고

 

그 몸짓

혈서를 쓰듯

유언장을 쓰는 하루

 

당신은

아무 이유 없는 나를

고독의 형틀에 매단다

 

빛살이고 싶더이다

 

1

혼과 혼 메아리가 종소리로 울리던 날

푸른 정 곧은 사람 더불어 꽃책 펴고

어둠을 긋는 반딧불 빛살이고 싶더이다

 

2

그대는 나의 자랑 나는 그대 그림자로

진리의 이 제단을 피땀으로 사르다가

새날을 곧추 세우고 한 줌 재로 남으리

 

3

껍질을 깨는 신비 아직 여린 몸짓으로

슬기로이 여는 새벽 신기루 걸린 하늘

퍼득여 숱한 날개짓 불사조의 넋이여

 

4

무지를 미워하여 불 밝힌 눈매여라

나랏말 겨레얼이 숨결로 피어나고

멍울진 마음밭 갈아 새 꽃씨를 묻고 싶다

 

5

붙잡고 쓰러지리 숫돌처럼 야윈 여일餘日

외길에 가난 끌고 무거운 짐 겨운 나날

노을빛 짙은 벼랑을 휘청이며 걷고 있다

 

 

                          * 김영흥 유고시집 하늘에서 부르는 출석부(나우, 1998)에서

                                                   * 사진 : 제주의 밭담

 

* 지금 맡은 글 쓰는데 참고할 혹시나 뭐 없을까 하고 책꽂이를 뒤지다 이 시집을 보았다. 사석에서만 보았지 하루도 같이 공부한 일이 없는 형(작자)과는 용문회라는 대학 학과동기 모임을 같이 하면서 자주 만나게 되었다. 내가 재학 중 군대에 가는 바람에, 형은 제대하고 복학해 동기들과 같이 수학한 인연이었다.

  형이 용문회 총무시절, 아침잠이 많지 않은 형은 6시면 전화를 걸어 회합의 내용을 전달하곤 했다. 그날은 일요일 아침이었는데 전날 통음을 하여 단잠을 자고 있는 나를 깨웠다. ‘오늘 조문허레 가야컨게, 고 선생 어머님 돌아가션 한동 조문가는디, 나 차로 같이 가게.’ 하던 목소리가 근 25년이 지난 지금도 귀에 선하다.

  그렇게 어질고 다정다감한 분이셨는데, 199776일 지병인 백혈병으로 인해 향년 56세를 일기로 우리 곁을 떠났다. 이 시집을 내는 날 문우들과 우리 회원, 사모님과 아들딸 남매와 함께 모여 벌였던 주인공이 없는 조촐한 모임을 기억한다. 형이 오랫동안 근무했던 오현고등학교 교정에 시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