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홍해리 시집 '정곡론'의 시들(4)

김창집 2021. 10. 5. 00:01

청산은 나를 보고

   -나옹懶翁선사 흉내 내기

 

부모님 나를 보고 바르게 살라 하고

자식들 나를 보고 꿋꿋이 살라 하네

출세도 벗어 놓고 권세도 벗어 놓고

산처럼 바다처럼 살다가 가라 하네.

 

아내는 나를 보고 다정히 살라 하고

친구들 나를 보고 신의로 살라 하네

독선도 벗어 놓고 이기도 벗어 놓고

땅처럼 하늘처럼 살다가 가라 하네.

 

어머니들 - 홍해리

 

가네 울타리에는

목 잘린 해바라기 대궁 하나 서 있고,

 

가네 밭에는

옥수수 이파리 바람에 부석거리고,

 

가네 산에는

알밤 털린 밤송이만 굴러다니고,

 

가네 논두렁에는

빈 꼬투리만 콩대에 매달려 있고,

 

가네 담에는

호박넝쿨 가을볕에 바싹 말라 있고,

 

가네 논에는

텅 빈 한구석 허수어미 하나 서 있네.

 

무현금無絃琴

 

한여름 우이도원牛耳桃源

푸른 숲 속

어디선가

거문고 우는 소리

가야금 타는 소리

도도동 도도동 도도동동

동동동 동동동 동동동동

백년 살다

백골사리로 빛나는

오동나무 한 그루

까막딱다구리가 속을 다 비워낸

텅 빈 성자의 맨몸을

쇠딱다구리

수백 마리

꽁지를 까닥이며

쬐그만 부리로 사리를 쪼고 있다

줄 없는 거문고

가야금 거문고가 따로 없다

온몸으로 우는

오동이 한 줄의 거대한 현이다.

 

설매雪梅

 

밖에는 눈이 내려

쌓이고,

방안에선 매화가 벙글었다

핀다

언제 적 눈맞춤이 꽃으로 맺고

또 언제 적 입맞춤이 이리 향을 피우는가

언뜻,

밖에 눈이 멎고

천지가 고요하다

드디어 꽃봉오리 터지고 있다

필 듯 필 듯하던

꽃이파리 하늘 가득 날리던

금방 청매실 부풀어

처녀들 가슴도 이내 벙긋거리겠다.

 

추석

 

차서 기울고

기울었다 다시 차면서

그대가

삶의 문턱을 넘어서기까지

천년도 더 걸렸다

치렁한 치맛자락

물 머금은 저고리 안섶

하늘하늘 하늘로

날아오르는

날개옷 스치는 소리

은분을 발라 치장한, 그대의

환한 얼굴

발그레한 볼

연연한 그리움으로

가슴에 금물이 드는

이 지상에서 그대를 본다

달아,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 홍해리 시집 정곡론(도서출판 움, 2020)에서

                                                     * 사진 : 억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