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강문신 시조집 '해동의 들녘'에서(1)

김창집 2021. 10. 9. 00:48

그곳에 가면

 

등위를 매기지 말라 혼신의 반생이다

애초 돌밭 둬 마지기 귤나무 그 숨 가쁜 도생

쓸개에

붙지 않았다

간에 붙은 적 없다

 

그들은

 

O, 시어 다듬듯 귤 묘목 가꾸다보면

정작 그 시마저 잊을 때가 있습니다

연초록 지고지순이 시어보다 곱습니다

 

사방이 바다입니다 넘실넘실 물결입니다

기도처럼 늘 고요한 민낯의 싱그러운 여인

그들에 푹 빠져 사는 날마다가 경이입니다

 

병충해 가뭄 물난리... 무시로 헤쳐 온 이력

한사코 "나대지마라, 쉬지 마라어르면서

기어이 상 뿌릴 내립니다 돌밭에서도 그들은

 

하루, 하루

 

농장의 신 새벽은 개 두 마리 환호로 열린다

시선암詩禪庵 산책로의 노송老松 숲에 이르러

문득 그 눈망울 초롱초롱 산 노루도 만난다

 

지난 봄 돌밭에 심은 귤나무들 돌아본다

그 혈색 곰곰 살피며 다독인다 북돋운다

긴긴 해 8월 땡볕은 아껴 써도 모자라

 

저녁연기 피어오르는 올망졸망 산마을같이

그 마을 양철지붕 성당의 종소리같이

은은히 저무는 하루 두 손 고이 모은다

 

족제비

 

족제비 단 한 번도 걷는 걸 본적 없다

옛날 우리 집 마당 병아리 채간 녀석

여전히 그 짓거리로 잘 먹고 잘 살겠지

 

항시 두리번두리번 쏜살같이 도망치는

느긋이 대명천지 한번 걸어보지 못하는 놈

그토록 약삭빨라도 차엔 곧잘 차이는

 

허기사 쫓기는 게 족제비 그 뿐이랴

너와 나 무슨 죄 깊어 이다지도 아득한가

맨 날 그 바쁘다, 바빠...” 한세상 다 가는데

 

코뚜레 들녘

 

길은 얼떨결에 반환점 휘돌아갔어

뉘 모를 아쉬움만 저만치 나앉아서

골똘히 반생을 보네 술 사발 기울이네

 

FTA 나발 불지만 곧들을 농심은 없어

걷힐라면 도로 안개 겹겹 그 어질 머리

들녘은 코뚜레 황소냐 그저 묵묵 끌고 끄는

 

기를 써도 겹던 날들 부릴 수도 없던 날들

돌아보면 아득도 해라 가슴 치는 이 그리움

여인아, 해동解冬의 들녘으로 우리는 함께 가자

 

 

                          * 강문신 시조집 해동의 들녘(문학과 사람, 2021)에서

                                                  * 사진 : 황금 들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