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김수열 시집 '바람의 목례'의 시(2)

김창집 2021. 10. 6. 00:36

1인 시위

 

한라병원 앞에 서 있었네

 

완전 고용 쟁취하자!”

사업주는 성실교섭에 임하라!”

 

비에 젖은 피켓 목에 걸고

거기 서 있었네

 

이따금 낯익은 사람들

어색한 웃음으로 눈인사하고

그나마 관심 있는 사람들은

힐끔 보다 그냥 돌아서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심하게

종종걸음으로 출근길 서두르던 날

거기 서 있었네

 

후려치고 갈라 치는 겨울 비바람

피켓 잡은 손 얼얼하고

서둘러 접어버릴까 갈등도 했었지만

생의 최전선에 나서본 때가

, 얼마만이던가

 

병원 앞 대로에서 홀로 버틴 반나절

, 진정으로 자유로웠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네

 

거짓말

 

선생님은 무얼 먹고 그렇게 키가 커요?”

 

풋과일 같은 여자애들

또랑또랑한 눈망울을 올려다본다

시선은 집중되고 정적이 감돈다

 

착한 마음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아이들 벌떼같이 소리 지른다

 

책상 탕탕 내려치는 놈

자다가 벌떡 깨는 놈

힐끗힐끗 눈 흘기는 놈

머리 싸매고 뒤집어지는 놈

우웩우웩 토악질 흉내 내는 놈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는 놈

교실 안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이다

 

그래, 이놈들아

말도 안 되는 소린 줄

낸들 왜 모르겠냐만

그래도 우기도 싶구나

너희들 앞에서만큼은

착한 척이라도 하고 싶구나

 

오늘도 버리지 못했다

 

닳고닳아 더는 신을 수 없어

신발장 구석이나 차지하고 있는

한갓 쓰레기에 불과한 것들이지만

함부로 버리지 못했다

나를 데리고 걸어온 숱한 길을 생각하면

살아온 날들조차 폐기처분되는 것 같아

함부로 버리지 못했다

가야할 길만을 걸어온 것도 아닌데

가고 싶지 않은 길도 가고

가서는 안 될 길을 간 적도 많은데

 

그래도 나를 데리고 온 길이

한순간에 지워질 것 같아

여태껏 버리지 못했다

어쩌다 술자리에서 바꿔 신었을지라도

그 사람이 걸어온 당당함 혹은 비틀거림이

나로 하여 사라질 것만 같아

함부로 버리지 못했다

 

신발장을 열 때마다 아내는

신지도 않는 걸 왜 모셔 두냐며 핀잔이지만

때가 되면 버린다 얼버무릴 뿐

언제 버려야 하는지

꼭 버려야만 하는지

나는 지금도 알지 못한다

 

불효

 

  앞자리 송 선생이 내게 다가와 나직이 말하기를, 바람 불면 스러질 것 같은 낡은 집에 사는 노모老母 위해 담배 갑만한 집 한 채 샀는데 명의 이전은 어떻게 하는 것이냐고 묻는데, 바람 한 점 불지 않아도 금방 주저앉을 것 같은 뼈마디 휘어진 늙은 집에 아직도 굼벵이처럼 살고 계신 어머니 아버지 주름진 얼굴이 왈칵 떠올라 나는

 

  어떤 대답도 해줄 수 없었다

 

연변 여자

 

그 여자를 보면 괜히 신경질이 난다

그녀의 아버지의 아버지는

일제에 빼앗긴 조선땅이 싫어

살아도 더는 살 수 없는 조국이 싫어

흑룡강으로 떠났는데

그 여자는 할애비가 버린,

땅 설고 물 설은 모국의 귀퉁이에 와서

허벅지 하얗게 내놓고 상반신 출렁이며

이름도~ ~~라요 서~엉도 몰라,

첨 만난 사내 푸움에 얼싸~안겨어어~‘

 

곰팡내 물씬 풍기는 단란주점에서

올망졸망 두고 온 식솔들

눈망울에 수평선을 담고 노래 부르는데, 씨발

왜 그리도 부아가 치솟는지

휘청휘청 밖에 나와 해장으로 국수를 먹는데, 씨발

국물은 왜 그리도 뜨거운지

전봇대에 기대어 오줌 누는데, 씨발

왜 죄 없는 가랑이만 축축이 젖는지

 

 

                                          *김수열 시집 바람의 목례(애지, 2006)에서

                                                    * 사진 : 한라산(수채화 효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