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인 시위
한라병원 앞에 서 있었네
“완전 고용 쟁취하자!”
“사업주는 성실교섭에 임하라!”
비에 젖은 피켓 목에 걸고
거기 서 있었네
이따금 낯익은 사람들
어색한 웃음으로 눈인사하고
그나마 관심 있는 사람들은
힐끔 보다 그냥 돌아서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심하게
종종걸음으로 출근길 서두르던 날
거기 서 있었네
후려치고 갈라 치는 겨울 비바람
피켓 잡은 손 얼얼하고
서둘러 접어버릴까 갈등도 했었지만
생의 최전선에 나서본 때가
아, 얼마만이던가
병원 앞 대로에서 홀로 버틴 반나절
나, 진정으로 자유로웠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네
♧ 거짓말
“선생님은 무얼 먹고 그렇게 키가 커요?”
풋과일 같은 여자애들
또랑또랑한 눈망울을 올려다본다
시선은 집중되고 정적이 감돈다
“착한 마음”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아이들 벌떼같이 소리 지른다
책상 탕탕 내려치는 놈
자다가 벌떡 깨는 놈
힐끗힐끗 눈 흘기는 놈
머리 싸매고 뒤집어지는 놈
우웩우웩 토악질 흉내 내는 놈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는 놈
교실 안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이다
그래, 이놈들아
말도 안 되는 소린 줄
낸들 왜 모르겠냐만
그래도 우기도 싶구나
너희들 앞에서만큼은
착한 척이라도 하고 싶구나
♧ 오늘도 버리지 못했다
닳고닳아 더는 신을 수 없어
신발장 구석이나 차지하고 있는
한갓 쓰레기에 불과한 것들이지만
함부로 버리지 못했다
나를 데리고 걸어온 숱한 길을 생각하면
살아온 날들조차 폐기처분되는 것 같아
함부로 버리지 못했다
가야할 길만을 걸어온 것도 아닌데
가고 싶지 않은 길도 가고
가서는 안 될 길을 간 적도 많은데
그래도 나를 데리고 온 길이
한순간에 지워질 것 같아
여태껏 버리지 못했다
어쩌다 술자리에서 바꿔 신었을지라도
그 사람이 걸어온 당당함 혹은 비틀거림이
나로 하여 사라질 것만 같아
함부로 버리지 못했다
신발장을 열 때마다 아내는
신지도 않는 걸 왜 모셔 두냐며 핀잔이지만
때가 되면 버린다 얼버무릴 뿐
언제 버려야 하는지
꼭 버려야만 하는지
나는 지금도 알지 못한다
♧ 불효
앞자리 송 선생이 내게 다가와 나직이 말하기를, 바람 불면 스러질 것 같은 낡은 집에 사는 노모老母 위해 담배 갑만한 집 한 채 샀는데 명의 이전은 어떻게 하는 것이냐고 묻는데, 바람 한 점 불지 않아도 금방 주저앉을 것 같은 뼈마디 휘어진 늙은 집에 아직도 굼벵이처럼 살고 계신 어머니 아버지 주름진 얼굴이 왈칵 떠올라 나는
어떤 대답도 해줄 수 없었다
♧ 연변 여자
그 여자를 보면 괜히 신경질이 난다
그녀의 아버지의 아버지는
일제에 빼앗긴 조선땅이 싫어
살아도 더는 살 수 없는 조국이 싫어
흑룡강으로 떠났는데
그 여자는 할애비가 버린,
땅 설고 물 설은 모국의 귀퉁이에 와서
허벅지 하얗게 내놓고 상반신 출렁이며
‘이름도~ 모~올~라요 서~엉도 몰라,
첨 만난 사내 푸움에 얼싸~안겨어어~‘
곰팡내 물씬 풍기는 단란주점에서
올망졸망 두고 온 식솔들
눈망울에 수평선을 담고 노래 부르는데, 씨발
왜 그리도 부아가 치솟는지
휘청휘청 밖에 나와 해장으로 국수를 먹는데, 씨발
국물은 왜 그리도 뜨거운지
전봇대에 기대어 오줌 누는데, 씨발
왜 죄 없는 가랑이만 축축이 젖는지
*김수열 시집 『바람의 목례』 (애지, 2006)에서
* 사진 : 한라산(수채화 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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