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세상

류시화 엮음 '잠언 시집'의 시(9)

김창집 2021. 10. 17. 00:02

진리에 대하여 - 벨포 경

 

우리가 최상의 진리라고 여기는 것은

절반의 진리에 불과하다.

 

어떤 진리에도 머물지 말라.

그것을 다만 한여름 밤을 지낼 천막으로 여기고

그곳에 집을 짓지 말라.

왜냐하면 그 집이 당신의 무덤이 될 테니까.

 

그 진리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할 때

그 진리에 반박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

슬퍼하지 말고 오히려 감사히 여기라.

그것은 침구를 거두어 떠나라는

신의 속삭임이니까.

 

당신이 하지 않은 일들 - 작자 미상(레오 버스카글리아 제공)

 

내가 당신의 새 차를 몰고 나가 망가뜨린 날을 기억하나요?

난 당신이 날 때릴 거라고 생각했지만 당신은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당신이 비가 올 거라고 말했는데도 내가 억지로 해변에 끌고 가 비를 맞던 때를 기억하나요?

난 당신이 비가 올 거라고 했잖아!” 하고 욕을 하리라 생각했지만 당신은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내가 당신을 질투 나게 하려고 다른 남자들과 어울려 당신이 화가 났던 때를 기억하나요?

난 당신이 떠나리라 생각했지만 당신은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당신은 내가 오렌지 주스를 당신 차의 시트에 엎질렀던 때를 기억하나요?

난 당신이 내게 소릴 지를 거라고 생각했지만 당신은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내가 깜박 잊고 당신에게 그 댄스파티가 정식 무도회라는 걸 말해 주지 않아서

당신이 작업복 차림으로 나타났던 때를 기억하나요?

난 당신이 내게 절교를 선언할 줄 알았지만 당신은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그래요, 내 생각과는 달리 당신이 하지 않은 일이 참 많았어요.

당신은 나에 대해 인내했고 나를 사랑했으며 보호해 주었어요.

당신이 베트남 전쟁에서 돌아올 때 당신에게 사과하는 뜻으로 내가 하려고 했던 일이 참 많았어요.

하지만 당신은 돌아오지 않았어요.

 

민들레 목걸이 제프 스완

 

아무것도 할 일이 없을 때가 있다.

아무데도 갈 곳이 없을 때가 있다.

사람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얘기 나눌 사람조차 없을 때가 있다.

그럴 때 나는 풀밭에 앉아

민들레 목걸이를 만든다.

어떤 민들레는 잘 되지만

어떤 건 그렇지 않다.

어떤 민들레는 너무 어리고

어떤 건 너무 늙었다.

민들레 목걸이를 만드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아무리 공을 들여도

풀어져 버린다.

어떤 때는 그걸 다시 묶을 수 있지만

어떤 때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아무리 잘 만들어도

민들레는 곧 시들어 버린다.

나는 이따금 풀밭으로 가서

민들레 목걸이를 만든다.

그래서 그런 사실들을

잘 알고 있다.

 

세상을 정복하더라도 고대 산스크리트 시인

 

내가 세상을 다 정복하더라도

나를 위한 도시는 오직 하나뿐.

그 도시에 나를 위한

한 채의 집이 있다.

그리고 그 집안에 나를 위한 방이 하나 있다.

그 방에 침대가 있고

그곳에 한 여인이 잠들어 있다.

내가 있을 곳은 오직 그곳뿐.

 

인생의 계획 글래디 로울러(63)

 

난 인생의 계획을 세웠다.

청춘의 희망으로 가득한 새벽빛 속에서

난 오직 행복한 시간들만을 꿈꾸었다.

내 계획서엔

화창한 날들만 있었다.

내가 바라보는 수평선엔 구름 한 점 없었으며

폭풍은 신께서 미리 알려주시리라 믿었다.

 

슬픔을 위한 자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내 계획서에다

난 그런 것들을 마련해 놓지 않았다.

고통과 상실의 아픔이

길 저 아래쪽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걸

난 내다 볼 수 없었다.

 

내 계획서는 오직 성공을 위한 것이었으며

어떤 수첩에도 실패를 위한 페이지는 없었다.

손실 같은 건 생각지도 않았다.

난 오직 얻을 것만 계획했다.

비록 예기치 않은 비가 뿌릴지라도

곧 무지개가 뜰 거라고 난 믿었다.

 

인생이 내 계획서대로 되지 않았을 때

난 전혀 이해 할 수 없었다.

난 크게 실망했다.

 

하지만 인생은 나를 위해 또 다른 계획서를 써 놓았다.

현명하게도 그것은

나한테 자신의 존재를 알리지 않았다.

내가 경솔함을 깨닫고

더 많은 걸 배울 필요가 있을 때까지.

 

이제 인생의 저무는 황혼 속에 앉아

난 안다, 인생이 얼마나 지혜롭게

나를 위한 계획서를 만들었나를.

그리고 이제 난 안다.

그 또 다른 계획서가

나에게는 최상의 것이었음을.

 

 

                            *류시화 엮음 잠언 시집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열림원, 2007)에서

                            *사진 : 제주 '선녀와 나무꾼'에서(2021. 10.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