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봄날의 경전
어떻게 지내냐 하기에
나는 별고 없다고 했다
그 말을 어떻게 들은 건지
어머니께 드리라고
작은 수국 화분 두 개를 사 가지고 왔다
어머니 누워 있는 방에
꽃 화분을 놓으니
어머니의 나비가 날아들었다
그 꽃 화분은 경전이 되었다
♧ 두부의 공식 – 마경덕
저것은 네모난 공식
문제를 풀면 네 개의 각을 얻을 수 있다
사방을 나누고 눈어림으로 재는 중량
해답은 말랑해서 비닐봉지에 담기거나 팩에 담긴다
첫 문장은 함부로 구르고 튕겨나가는 딱딱한 공식
변수가 있어 정량의 물을 더하고 거품을 뺐다
회오리처럼 휘돌다가도 뜨거운 불길만 무사히 건너면
잘 될 거라 믿었던 사내
완성품을 기다리며 허기진 시간을 견뎠다
간수를 넣는 과정만 통과하면 쓸 만한 물건이 될 거라고
부글거리는 잡념까지 걸러내었다
순두부처럼 몽글거리는 아들에게,
반듯하게 살아라
물러터지면 아무 짝에도 못 쓴다
네모난 틀은 아버지의 공식
거름포를 깔고 뭉친 마음을 부었지만 반듯한 각을 얻지는 못했는지,
구치소 앞
두부를 들고 기다리는 아버지
저기 물렁한 두부 한 모 걸어나온다
♧ 함정 - 문경재
입을 가린 채 그곳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그 어둠
또 짙은 침묵
무대도 없이 구석에 누군가 앉아있었다
소리 없는 음악
헬스트레이너였다 고개를 무릎에 파묻고
엘이디 두어 개 불빛이 러닝머신 위에 가지런했다
다리에서 뛰어내리기보다는
물속에서 숨을 참는 자세로
내가 뒤돌아 나오는 것도 모른 채
정수리, 어깨, 팔뚝의 실루엣이
어떤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 레인니어산 원더랜드Wonerland* - 김영호
나무들이 손을 들어 올려 합창을 불렀네
상처 많은 나무들이 더 큰 소리로 불렀네
산꽃들이 온 몸으로 합창을 불렀네
상처 많은 꽃들이 더 큰 소리로 불렀네
상처가 많았다는 것은
사랑이 많았다는 것
나무나 사람이나 사랑이 많은 자가
상처가 많은 것
가장 큰 사랑으로
가장 큰 상처를 받은 인자…
나무들 합창소리 내 몸속으로 들어오니
나의 상처들이 생의 환희를 노래했네
산꽃들 합창소리 내 영혼 속으로 들어오니
나의 상처들이 생의 승리를 노래했네
새들의 합창소리 내 가슴속으로 들어오니
나의 상처들이 산꽃으로 피어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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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워싱턴주 국립공원의 만년설산.
♧ 다정무정多情無情
오늘도 사람들 하고 살 거야? 거울이 묻기에
응, 나는 사람들이 싫어, 했더니
그럼 사람 좋은 척하지 마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다 잘해 주지 마
거울이 쏘아붙였다
나는 묵묵히 밥을 먹은 뒤
사람들 속으로 사라질 준비를 한 다음
거울 속 나를 힐끗 쳐다보았다
♧ 레테의 강 - 임미리
레테의 강을 찾아 나선다.
길눈이 밝은 안내자를 만나
그 강에 도달하고 싶다.
모르는 척 그 강물 한 모금 마시고 싶다.
찬 서리 내려 잎새는 붉어지고
마지막 잎새도 자취를 감추면
그 강 한 발짝 가까워질 것이다.
저 멀리 은사시나무 우둠지에 휘영청
눈 시린 달이 뜬다고 하여도
그 강을 찾아 나서는
발걸음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어느 날 돌아올 수 없는
망각의 강을 건너리라.
덧없이 흘러가는 시간은 다 잊으리라.
살아온 기억을 지우리라.
그 강 낙원으로 향하는 길
잊지 않고 정중히 맞아주리라.
*월간 『우리詩』 2021년 10월 400호에서
*사진 : 자주쓴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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