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임채우 시집 '설문雪門' 발간

김창집 2021. 10. 19. 00:01

시인의 말

 

새를 기다린다

 

나무들이 울창한 숲이나

사람들이 북적대는 저잣거리에서

새가 날아가 버린 조롱 하나 들고서

눈물 나게 어여쁜 너의 자태

귀먹어 황홀했던 너의 목소리

네가 돌아올 날을 꿈꾸며

새를 기다린다

 

내 안에 한 소리 있어

어리석은 자를 통박하며 일갈하길

방황하는 어린 자여!

조롱을 던져 버려라

그리하면 온 세상이 그대의 새장

지상의 모든 새가 네 안에 깃을 치리니

 

 

2021년 초가을

峴山에서

임채우

 

허유재虛留齋

 

비우기 위해 머무는 집

어디 고즈넉한 수도원이나 명상 센터가 아니다

배불뚝이들이 애를 낳기 위해, 홀쭉이가

달을 품기 위해, 그늘진 얼굴로 드나드는 곳

이 도시 팔 층짜리 산부인과 병원

둘째가 둘째를 낳을 때가 되어

친정부모와 함께 동굴로 들어간다

자궁이 반나마 열렸다는 진단받고

사위가 직장에서 달려오고

분만실 밖은 초조와 불안이 서성댄다

동굴 안으로 불려 들어가는 세상 남편들이여

오늘의 주역은 그대들이 아니다

몸을 낮춰 더욱 조연에 충실하라

남자라는 것이 자칫 원망의 대상이 될 수도 있으니

하물며 친정 아비쯤이야 감히 들이밀지도 못하고

대기실 의자에 앉아 태어날 손자놈 이름자나 조합해 보는 수밖에

딸애는 진통 중

오후 두 시,

긴 순간,

요란한 침묵

 

산딸나무 - 임채우

 

산딸나무 하얀 나비 떼

마름모형 꽃이 실은 잎이라나

아파트 단지 화단 한쪽

비쭉비쭉 우듬지 돋고

산딸나무 꽃잎 지고

삐죽삐죽 돋아나고

잎 색깔 열매 맺고

 

타고난 대로 고스란히

잎인 듯 열매인 듯

크지도 작지도 별나지 않게

투정도 시기도 다툼도 없이

있는 둥 마는 둥

엷은 초록으로

 

기러기

 

철조망 두른 한강 하구

공중에 상형문자 쓰고

서로 부르고 답하며

북으로, 북으로

기러기 떼

날아간다

 

눈 덮인 안데스를 넘어 망명길에 오른

칠레의 민중시인 네루다처럼

 

길 가다 하늘 보고

혼잣말하는 인생이 있다

 

연어알

 

인공 부화동에 석류알 같이

다닥다닥 발갛고 동그란

연어알, 연어알

 

천둥과 번개

심해의 고독이

간절한 나날의 소망이

죽어야 끝나는 물살 거스르는 싸움이

네 안에 고스란히 있나니

강 따라 바다로 나아가

북태평양 한 바퀴 돌아

고향 만릿길

사무친 물맛

 

드난살이 앞에 너무나도 천진스러운

유년의 동산에서 함께했던 동무들

다닥다닥 발갛고 동그란

연어알, 연어알

 

석류를 깨뜨리며

 

아무도 찾는 이 없는 제야

창밖엔 진눈깨비가 내리고

부부가 거실에 마주 앉아

석류를 깨뜨린다

 

검버섯 갑옷을 열면

어느 먼 나라에서 쏟아지는 햇살

핏빛 머금은 상앗빛 고른 치열

새콤하고 다디단 너의 헌신

 

이 밤에 보석을 캔다는 것은

낡은 사진첩을 뒤적이며

영롱한 언어탑을 허물었다

다시 고운 거로 세우는 작업

 

때로는 상큼한 미각처럼 환했다

어디론가 덤덤히 흘러가는 생이여

창밖엔 진눈깨비가 내리고

거룩한 옥합인 양 옥합을 깨뜨린다

 

 

                                       *임채우 시집 설문雪門(우리, 2021)에서

                                            *사진 : 설악산의 가을빛(수채화 효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