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두암
꿈꾸는 사람들은 용바위를 안고 산다
수평선 눈높이로 손가락을 걸었던
그 멍에 경매에 부쳐 겨울 파도에 싯기고
유채꽃 그 뿌리로 용담동에 찾아왔다
터 잡은 늙은 어부 흔들리는 일상에도
외끌이 매어둔 바다 갈치바늘 반짝인다
끌어라 외끌이여, 샛바람을 끌어라
승천을 저당잡힌 용두암이 꿈틀댄다
천년의 팽팽한 닻줄 시방 툭 끊고 싶다
♧ 신제주 나팔꽃
용케 살아 있었구나
늦가을 이 새벽에
어느새 농장까지 먼저 와 있었구나
비행기 뜨고 내리듯
또 피고 지는구나.
근조화도 못되고
꽃다발도 못되고
그래서 미안한지 돌담 곁에 비켜서서
한 세상 밥값을 하듯
뱃고동 소리 피워낸다.
사철나무 생울타리
한낮을 떠메고
예닐곱 햇살 같은 내 그리움 떠메고
밤마다 대문을 걸어도
되살아난다, 이 야성.
♧ 가을 편지
떡갈나무 밑둥치 눈 시리게 새기던
마른 꽃 언저리 마른 냄새나는 이름
들녘의 사금파리로
내 손등을 찍고 싶다
햇살 한 움큼이 목젖으로 숨어든다
남문통 그 골목에 차압당한 노을이
철대문 딱지 붙이듯
내 가슴에 붙은 딱지.
♧ 여름파장
한여름 꽃잎에도 복병처럼 가을은 있다
주일날 성당에 못간 철 이른 코스모스
현금도 추스르지 못한 때 절은 여름은 간다
젊은 애인 고백이다 순명하는 저 차도 변
판자로 덧댄 길에 못 자국이 녹슨다
바다는 아침녘에야 간신히 파장한다
밀물로 든 포구 목젖까지 차올라
받을 도시 하나 없는 장미 목을 잘라낸다
한 세상 폐기처분된 검붉은 가시가 된다
♧ 나의 행간
다호동 꽃마을 비행기 뜨고 내리면
오늘도 또 피었다, 거베라 저 망할 것
까치들 총포소리에 시위하는 날갯짓
하늘이 부친 경매 너를 낙찰 받은 거다
거베라꽃 피는 사이 제대 앞둔 아들아
오너라, 저 거친 불배 향기로 뜬 이 포구에
♧ 옛 등대로 오라
여태껏 못 떠났나 제주항 저 방파제
금채기 해녀들을 다 가둔 바다가
산지천 거슬러 와서
등대로 핀 쇠별꽃.
애당초 그 불빛들은 승선하지 않았다
사라봉에서 별도봉으로 바닷길만 감아 돌던
잘 가라 허기진 청춘
다시 못 올 이 세상을.
누가 나를 매었나 항구의 비트에
연삼로 왕벚꽃 훑고 간 상끌이선단
먼 바다가 불빛 하나가
속절없이 나를 끈다.
*김윤숙 시집 『가시낭꽃 바다』 (고요아침, 2007)에서
*사진 : 한라산 상고대(옛날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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