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제주문학' 2021년 가을호의 시(1)

김창집 2021. 10. 21. 09:59

여아대如我待 - 강덕환

 

내게도 코로나에 상관없이

맘대로 세상을 드나들던

저런 패스포트 한 장 있었다면

개항 압력에 굴복한 고종이

프랑스 신부들에게 줬다는, 저 증표

 

목에 걸까, 허리춤에 찰까

아니지, 윗주머니에 간직했다가

나 이런 사람이요하고,

내밀면 포교와 세금포탈

폭행과 약탈도 눈감아줬던

무소불위 치외법권의 완장

 

나를 모시듯 대접하라

신축항쟁을 낳고

이재수를 참수하며

종말을 고하던 대한제국의

슬픈 허우대

 

우턴 아이 강봉수

 

웃인 죄도 멩글앙

해코지 허는 사름 신다

 

탐라국 제주에 물 건너 온 베실와치

ᄉᆞ삼 난리통에 코쟁이광 서북청년단

 

이뿐이카

 

오널 날에도 법을 무기 삼앙 큰냥ᄒᆞ는 ᄂᆞᆷ

나랏님 큰 베슬 눈 벌겅ᄒᆞ게 ᄃᆞ투멍

ᄂᆞᆷ을 멜싸사 지 시상 온덴 ᄂᆞᆸ뜨는 아이

 

직산ᄒᆞᆯ 디가 읏다

 

목신 놈은 커싱커싱 ᄆᆞᄉᆞᆸ곡

후턴 ᄂᆞᆷ은 거렁청이 잡으난

 

가슴에는 새가 산다 고영숙

 

피고 지는 것들은 무엇을 부러워했을까

사선을 그으며 건너가는 눈먼 활공

실핏줄마다 금이 간 투명한 유리벽

깃을 치며 비스듬히 날아가는 새 떼들

허공에 몸을 숨길 줄 아는 건 오래된 처세술

투신하는 족족 명중이다

고층 빌딩은 종종 윈도스트라이크*

사선으로 흐르는 공중 무덤

날이 바짝 선 바람칼의 회전

트랙을 따라 도는 빈 하늘

투명한 족적足跡을 밝히는 격자무늬 조등弔燈

상주도 영정도 없는 장례식장

새털에 실린 부음이 허공을 질러온다

휘청거리는 아파트 공중에서도

가슴에는 새가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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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도스트라이크 : 건물 유리창, 투명 방음벽에 새들이 부딪쳐 죽는 현상.

 

코스모스 김경훈

 

살랑살랑

가만히

바람을 흔들면서

 

여리여리

아늑히

햇살을 누리면서

 

도란도란

살뜰히

벗들을 기대면서

 

하늘하늘

가뿐히

우주에 닿고 있구나

 

드문 아침이었음을 모르랴만 김병택

 

전신주에 안개구름 드리운 아침

구불구불한 동네 길을 걷다가

이웃집 담장에서 나를 쳐다보는

한 그루의 피튜니아를 만났다

 

내 옆으로 슬며시 다가오는

붉은 빛의 연한 향기가

머리 주위를 배회하는

자질구레한 근심들을

조금씩 거두어들였다

 

청자색 하늘이 높은 아침

아직도 희미하게 남아 있는

밤의 그림자를 지우며

동네 길을 걷다가

내게 달려오는 금빛

햇살의 무리와 마주쳤다

수없이 부딪쳤던 터여서

전혀 낯설지 않았다

 

불볕 낮이 찾아오기 전

문득 돌아본 아침에는

둥근 다발의 무채색 바람이

빠르게 움직이는 게 보였다

 

드문 아침이었음을 모르랴만

 

심금을 울린 이 있어 김성주

 

하늘이 흐립니다

며칠째 가랑비,

오락가락하고 있습니다

 

유리창 밖에 흐르는 옅은 안개에 끌려

뜰로 나왔습니다

 

벽틈에 숨어 봉숭아가 여린 손을 내밀어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멍하니 서서 나어린 달리트 소녀를 보았습니다

 

두 손 모아 조심스레

꽃밭에 옮겨 심었습니다

 

그 때, 아스라이 들리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 시 :  제주작가2021 가을호(통권 제74)에서

                                           * 사진 : 해녀, 용궁을 드나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