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월간 우리詩 2021년 10월호의 시(3)

김창집 2021. 10. 20. 00:30

봄날의 경전

 

어떻게 지내냐 하기에

나는 별고 없다고 했다

 

그 말을 어떻게 들은 건지

어머니께 드리라고

작은 수국 화분 두 개를 사 가지고 왔다

 

어머니 누워 있는 방에

꽃 화분을 놓으니

어머니의 나비가 날아들었다

 

그 꽃 화분은 경전이 되었다

 

두부의 공식 마경덕

 

저것은 네모난 공식

문제를 풀면 네 개의 각을 얻을 수 있다

사방을 나누고 눈어림으로 재는 중량

해답은 말랑해서 비닐봉지에 담기거나 팩에 담긴다

 

첫 문장은 함부로 구르고 튕겨나가는 딱딱한 공식

변수가 있어 정량의 물을 더하고 거품을 뺐다

 

회오리처럼 휘돌다가도 뜨거운 불길만 무사히 건너면

잘 될 거라 믿었던 사내

완성품을 기다리며 허기진 시간을 견뎠다

간수를 넣는 과정만 통과하면 쓸 만한 물건이 될 거라고

부글거리는 잡념까지 걸러내었다

 

순두부처럼 몽글거리는 아들에게,

 

반듯하게 살아라

물러터지면 아무 짝에도 못 쓴다

네모난 틀은 아버지의 공식

거름포를 깔고 뭉친 마음을 부었지만 반듯한 각을 얻지는 못했는지,

 

구치소 앞

두부를 들고 기다리는 아버지

저기 물렁한 두부 한 모 걸어나온다

 

함정 - 문경재

 

입을 가린 채 그곳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그 어둠

 

또 짙은 침묵

 

무대도 없이 구석에 누군가 앉아있었다

 

소리 없는 음악

 

헬스트레이너였다 고개를 무릎에 파묻고

 

엘이디 두어 개 불빛이 러닝머신 위에 가지런했다

 

다리에서 뛰어내리기보다는

 

물속에서 숨을 참는 자세로

 

내가 뒤돌아 나오는 것도 모른 채

 

정수리, 어깨, 팔뚝의 실루엣이

 

어떤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레인니어산 원더랜드Wonerland* - 김영호

 

나무들이 손을 들어 올려 합창을 불렀네

상처 많은 나무들이 더 큰 소리로 불렀네

산꽃들이 온 몸으로 합창을 불렀네

상처 많은 꽃들이 더 큰 소리로 불렀네

상처가 많았다는 것은

사랑이 많았다는 것

나무나 사람이나 사랑이 많은 자가

상처가 많은 것

 

가장 큰 사랑으로

가장 큰 상처를 받은 인자

 

나무들 합창소리 내 몸속으로 들어오니

나의 상처들이 생의 환희를 노래했네

산꽃들 합창소리 내 영혼 속으로 들어오니

나의 상처들이 생의 승리를 노래했네

새들의 합창소리 내 가슴속으로 들어오니

나의 상처들이 산꽃으로 피어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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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워싱턴주 국립공원의 만년설산.

   

다정무정多情無情

 

오늘도 사람들 하고 살 거야? 거울이 묻기에

, 나는 사람들이 싫어, 했더니

 

그럼 사람 좋은 척하지 마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다 잘해 주지 마

거울이 쏘아붙였다

 

나는 묵묵히 밥을 먹은 뒤

사람들 속으로 사라질 준비를 한 다음

 

거울 속 나를 힐끗 쳐다보았다

 

레테의 강 - 임미리

 

레테의 강을 찾아 나선다.

길눈이 밝은 안내자를 만나

그 강에 도달하고 싶다.

모르는 척 그 강물 한 모금 마시고 싶다.

찬 서리 내려 잎새는 붉어지고

마지막 잎새도 자취를 감추면

그 강 한 발짝 가까워질 것이다.

저 멀리 은사시나무 우둠지에 휘영청

눈 시린 달이 뜬다고 하여도

그 강을 찾아 나서는

발걸음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어느 날 돌아올 수 없는

망각의 강을 건너리라.

덧없이 흘러가는 시간은 다 잊으리라.

살아온 기억을 지우리라.

그 강 낙원으로 향하는 길

잊지 않고 정중히 맞아주리라.

 

 

                                                  *월간 우리202110400호에서

                                                                *사진 : 자주쓴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