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름다운 거짓말
느그 작은아부지 돌아가셨을 때 빤듯한 사진 한나 없응께 영판 옹삭시럽드라 할 일이라고는 아들놈 장가보낼 일만 남았다는 회갑 넘은 숙모는 십만 원 들여 영정사진 찍었다고 자랑을 하였습니다 와따 이쁘네 내 말에 볼 붉히는 숙모는 액자 속의 여자보다 훨씬 늙어 있었습니다 볼이 통통한 얼굴을 보며 그린 거요? 했더니 사진이라는 말을 몇 번이고 반복했습니다 컴퓨터로 편집했네 나는 서툰 알음을 은근히 내비쳤습니다 노인네가 물정 모르고 바가지 썼다는 말까지 할 참이었는데 나는 이내 입을 다물고 말았습니다 틀 속의 여자는 한쪽 눈이 먼 숙모가 아니었습니다
♧ 하고댁
비는 왜 피리봉 쪽에서 오는지
마흔에 혼자된 하고댁은 먹구름이 피리봉에 엎드릴 때면
나락 베던 낫 놓고 욕을 하곤 했는데
피리봉 아래 절터골에 저승살림 차린 영감
그렇게 일찌거니 딴살림 차렸냐고
죽어서도 보기 싫다며 욕을 해댔는데
염벵 염천얼 허네
염벵 첨벵을 허네 하면서 욕을 해댔는데
영감은 영감대로 부아가 났는지
침 튀겨가며 맞고함치듯 우레소리에 마을이 쩌렁거리고
벼락같이 쏟아진 비에 하고댁 몸뻬가 젖고
어떨 땐 속곳까지 후줄근히 물범벅이 되었는데
그럴 때면 꼭 하고댁은
염벵 씹벵
고두마리 씹벵
잠자리 눈꾸녁
염벵 씹벵 고두마리 씹벵 잠자리 눈꾸녁
욕 노래를 부르곤 했는데
비 끝에 단풍은 피리봉부터
확확 달아오르고는 했는데
♧ 양산 이숙
안지다리는 장마지면 항상 넘치었다 개학 날 다가와 집에 가야 하는데 어린 내 나무젓가락 같은 다리로는 다리 건널 수 없었다 턱수염 시커먼 사내 이숙의 등에 업혀 안지다리 건넜다 입 떡 벌리며 배고프다며 탐진강 검은 물결이 소리칠 때 오돌돌 떠는 건 내 어린 가슴 뿐 거세게 비 내리쳐 마을은 가물거렸다 백 원짜리 두 개 집어주며 조심해 가그라이 말하던 이숙은 내가 버스에 오르자 경운기처럼 덜컹거리며 안지다리로 향했다 완행버스는 따뜻하였지만 이숙의 등보다는 못했다 그로부터 한 이십 여 년 그 따뜻했던 늙은 사내 터덜터덜 저승으로 향하였다
♧ 아름다운 위반
기사 양반! 저짝으로 조깐 돌아서 갑시다
어칳게 그란다요 뻐스가 머 택신지 아요?
아따 늙은이가 물팍이 애링께 그라제
쓰잘데기 읎는 소리 하지 마시오
저번챀에 기사는 돌아가듬마는……
그 기사가 미쳤능갑소
노인네가 갈수록 눈이 어둡당께
저번챀에도
내가 모셔다 드렸는디
♧ 명자꽃 보면
목숨 있는 모든 것 물이 올라서
봄 깊어 물리게 깊은 봄이면
꽃 진 자리 새 꽃 피어 욕도 농이 되는데
헤프다 싶게 몸 여는 꽃들을 보면
걸쭉한 욕쟁이 영춘이성 떠올라
입 열면 씨발 씨발 거친 손 재주 많아
우산대 하나로 총 만들어 고라니를 잡았던
아침 전에 깔 한 짐 사고무친 애기 일꾼
시방은 공장 차려 살만하다 하던데
어느 해 봄
바지게에 햇살 한 짐 지고
깽벤에 봇일 나가던 영춘이성
쑥대머리 지나며
나물 캐는 가시내들 보면서 뱉었던 말
볕이 따땃항께
모태서 오오지 몰리냐?
저 환한 명자꽃 보면서
왜 그 말 떠올랐는지 몰라
♧ 수문 양반 왕자지
예순 넘어 한글 배운 수문댁
몇 달 지나자 도로 표지판쯤은 제법 읽었는데
자응 자응 했던 것을
장흥 장흥 읽게 되고
과냥 과냥 했던 것을
광양 광양 하게 되고
광주 광주 서울 서울
다 읽게 됐는데
새로 읽게 된 말이랑 이제껏 썼던 말이랑
통 달라서
말 따로 생각 따로 머리속이 짜글짜글 했는데
자식 놈 전화 받을 때도
옴마 옴마 그래부렸냐? 하다가도
부렸다와 버렸다 사이에서
가새와 가위 사이에서
혀가 쎄와 엉켜서 말이 굳곤 하였는데
어느 날 변소 벽에 써진 말
수문 양반 왕자지
그 말 하나는 옳게 들어왔는데
그 낙서를 본 수문댁
입이 눈꼬리로 오르며
그람 그람 우리 수문 양반
왕자 거튼 사램이었제
왕자 거튼 사램이었제
*이대흠 시집 『귀가 서럽다』 (창비, 2010)에서
*사진 : 장흥 천관산에서(수채화 효과 필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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