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의 부부에 대한 시 - 바바 하리 디스
머리가 둘인 백조가 있었다.
그래서 머리가 하나인 백조보다 더 빨리 먹을 수 있었다.
어느 날인가
백조의 두 머리는 어느 쪽이 더 빨리 먹을 수 있나를 놓고
서로 싸우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를 미워하기 시작했다.
한쪽 머리가 독이 든 열매를 발견하고는 말했다.
“난 더 이상 너와 함께 살 수 없어.”
그러자 다른 쪽 머리가 말했다.
“안 돼! 먹지 마! 네가 그걸 먹으면 우린 둘 다 죽어.”
하지만 그 머리는 화가 나서 독 있는 열매를 삼켰다.
그렇게 해서 머리 둘 달린
백조는 죽고 말았다.
♧ 다섯 연으로 된 짧은 자서전 - 작자미상
1
난 길을 걷고 있었다.
길 한가운데 깊은 구멍이 있었다.
난 그곳에 빠졌다.
난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건 내 잘못이 아니었다.
그 구멍에서 빠져나오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2
난 길을 걷고 있었다.
길 한가운데 깊은 구멍이 있었다.
난 그걸 못 본 체했다.
난 다시 그곳에 빠졌다.
똑같은 장소에 또다시 빠진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내 잘못이 아니었다.
그곳에서 빠져나오는 데
또다시 오랜 시간이 걸렸다.
3
난 길을 걷고 있었다.
길 한가운데 깊은 구멍이 있었다.
난 미리 알아차렸지만 또다시 그곳에 빠졌다.
그건 이제 하나의 습관이 되었다.
난 비로서 눈을 떳다.
난 내가 어디 있는가를 알았다.
그건 내 잘못이었다.
난 얼른 그곳에서 나왔다.
4
내가 길을 걷고 있는데
길 한가운데 깊은 구멍이 있었다.
난 그 둘레로 돌아서 지나갔다.
5
난 이제 다른 길로 가고 있다.
♧ 나무 - 천상병
사람들은 모두 그 나무를 죽은 나무라고 그랬다.
그러나 나는 그 나무가 죽은 나무는 아니라고 그랬다.
그 밤 나는 꿈을 꾸었다.
그리하여 나는 그 꿈속에서 무럭무럭 푸른 하늘에 닿을 듯이 가지를 펴며 자라가는 그 나무를 보았다.
나는 또 다시 사람을 모아 그 나무가 죽은 나무는 아니라고 그랬다.
그 나무는 죽은 나무가 아니다.
♧ 그는 - 정호승
그는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때
조용히 나의 창문을 두드리다 돌아간 사람이었다.
그는 아무도 나를 위해 기도하지 않을 때
묵묵히 무릎을 끓고
나를 위해 울며 기도하던 사람이었다.
내가 내 더러운 운명의 길가에 서성대다가
드디어 죽음의 순간을 맞이했을 때
그는 가만히 내 곁에 누워 나의 죽음이 된 사람이었다.
아무도 나의 주검을 씻어주지 않고
뿔뿔이 흩어져 촛불을 끄고 돌아가 버렸을 때
그는 고요히 바다가 되어 나를 씻어준 사람이었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자를 사랑하는
기다리기 전에 이미 나를 사랑하고
사랑하기 전에 이미 나를 기다린.
♧ 한 친구에 대해 난 생각한다 - 막스 에르만
한 친구에 대해 난 생각한다.
어느 날 나는 그와 함께 식당으로 갔다.
식당은 손님으로 만원이었다.
주문한 음식이 늦어지자
친구는 여종업원을 불러 호통을 쳤다.
무시를 당한 여종업원은
눈물을 글썽이며 서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우리가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난 지금 그 친구의 무덤 앞에 서 있다.
식당에서 함께 식사한 것이
불과 한 달 전이었는데
그는 이제 땅 속에 누워 있다.
그런데 그 10분 때문에 그토록 화를 내다니.
*류시화 엮음 잠언 시집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열림원, 2007)에서
*사진 : 안나푸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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