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류시화 엮음 '잠언 시집'의 시(10)

김창집 2021. 10. 25. 14:44

세상의 부부에 대한 시 - 바바 하리 디스

 

머리가 둘인 백조가 있었다.

그래서 머리가 하나인 백조보다 더 빨리 먹을 수 있었다.

 

어느 날인가

백조의 두 머리는 어느 쪽이 더 빨리 먹을 수 있나를 놓고

서로 싸우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를 미워하기 시작했다.

 

한쪽 머리가 독이 든 열매를 발견하고는 말했다.

난 더 이상 너와 함께 살 수 없어.”

그러자 다른 쪽 머리가 말했다.

안 돼! 먹지 마! 네가 그걸 먹으면 우린 둘 다 죽어.”

하지만 그 머리는 화가 나서 독 있는 열매를 삼켰다.

 

그렇게 해서 머리 둘 달린

백조는 죽고 말았다.

 

다섯 연으로 된 짧은 자서전 - 작자미상

 

1

난 길을 걷고 있었다.

길 한가운데 깊은 구멍이 있었다.

난 그곳에 빠졌다.

난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건 내 잘못이 아니었다.

그 구멍에서 빠져나오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2

난 길을 걷고 있었다.

길 한가운데 깊은 구멍이 있었다.

난 그걸 못 본 체했다.

난 다시 그곳에 빠졌다.

똑같은 장소에 또다시 빠진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내 잘못이 아니었다.

그곳에서 빠져나오는 데

또다시 오랜 시간이 걸렸다.

 

3

난 길을 걷고 있었다.

길 한가운데 깊은 구멍이 있었다.

난 미리 알아차렸지만 또다시 그곳에 빠졌다.

그건 이제 하나의 습관이 되었다.

난 비로서 눈을 떳다.

난 내가 어디 있는가를 알았다.

그건 내 잘못이었다.

난 얼른 그곳에서 나왔다.

 

4

내가 길을 걷고 있는데

길 한가운데 깊은 구멍이 있었다.

난 그 둘레로 돌아서 지나갔다.

 

5

난 이제 다른 길로 가고 있다.

 

나무 - 천상병

 

사람들은 모두 그 나무를 죽은 나무라고 그랬다.

그러나 나는 그 나무가 죽은 나무는 아니라고 그랬다.

그 밤 나는 꿈을 꾸었다.

그리하여 나는 그 꿈속에서 무럭무럭 푸른 하늘에 닿을 듯이 가지를 펴며 자라가는 그 나무를 보았다.

나는 또 다시 사람을 모아 그 나무가 죽은 나무는 아니라고 그랬다.

 

그 나무는 죽은 나무가 아니다.

 

그는 - 정호승

 

그는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때

조용히 나의 창문을 두드리다 돌아간 사람이었다.

그는 아무도 나를 위해 기도하지 않을 때

묵묵히 무릎을 끓고

나를 위해 울며 기도하던 사람이었다.

내가 내 더러운 운명의 길가에 서성대다가

드디어 죽음의 순간을 맞이했을 때

그는 가만히 내 곁에 누워 나의 죽음이 된 사람이었다.

아무도 나의 주검을 씻어주지 않고

뿔뿔이 흩어져 촛불을 끄고 돌아가 버렸을 때

그는 고요히 바다가 되어 나를 씻어준 사람이었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자를 사랑하는

기다리기 전에 이미 나를 사랑하고

사랑하기 전에 이미 나를 기다린.

 

한 친구에 대해 난 생각한다 - 막스 에르만

 

한 친구에 대해 난 생각한다.

어느 날 나는 그와 함께 식당으로 갔다.

식당은 손님으로 만원이었다.

 

주문한 음식이 늦어지자

친구는 여종업원을 불러 호통을 쳤다.

무시를 당한 여종업원은

눈물을 글썽이며 서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우리가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난 지금 그 친구의 무덤 앞에 서 있다.

식당에서 함께 식사한 것이

불과 한 달 전이었는데

그는 이제 땅 속에 누워 있다.

그런데 그 10분 때문에 그토록 화를 내다니.

 

 

                                                     *류시화 엮음 잠언 시집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열림원, 2007)에서

                                                         *사진 : 안나푸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