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강문신 시조집 '해동의 들녘'에서(3)

김창집 2021. 10. 23. 10:25

난민

 

한사코 땅을 향한 목마른 길이 있다

생사의 암벽을 타야 꿈꾸는 길이 있다

무수한 난민의 행렬, 월경하는 뿌리가 있다

 

열두 번 보따리 싼 내 젊음도 정작 난민

허기의 그날 밤들은 어찌 그리 취하던지

안 된다, 취하면 안 된다늘 취하며 되뇌던

 

핸드폰 울림에도 빚 독촉은 감지됐다

가도 가도 향방 모를 청 억새 날선 벌을

어머니 먼 심려였나, 간절한 그 새소리

 

울림

 

내 차 소릴 어찌 알고 동산까지 달려 나와

펄쩍 펄쩍펄쩍 하늘만큼 반기는 개

어스름 농장의 아침은 또 이렇게 열린다

 

연초록 넘실넘실 넘실대는 육묘장의

귤 묘목 시선들은 오롯이 날 향해 있어

진종일 쉴 틈도 없는, 비명이다 신명이다

 

시선암詩禪庵 그 암벽의 고목들 성성한 연륜

말씀은 없으셔도 서늘한 울림 있어

-가던 길, 가는 것이여, 그저 묵묵나대지 마-

 

헛가지

 

귤나무 전정한다 하향지下向枝 내향지內向枝

평행지平行枝 도장지徒長枝는 여지없이 잘라낸다

햇빛을 잘 들게 하는 결실성結實性을 높이는

 

이 들녘 고비마다 숨 가쁜 세월자국들

와중엔 사랑이라는 거시기한 변명도 있어

키워도 음지陰地의 가지 결실성이 희박한

 

입으로 꿩 가리키듯 선생질은 다 하면서

정작 그 마음 하나 어쩌지 못하느니

~ 나는 귤나무일까, 잘려야 할 그 내향지

 

폭염暴炎 1

 

글쎄 그 홀아비가 재혼을 했는데요

신부는 부산갈매기 예쁘고 싹싹했어요

멀쩡한 동네 노총각들 배가 많이 아팠던

 

신혼 그 한 여름 밤 첫닭도 울기 전에

곤한 잠 흔들어서 덜컹덜컹 달려간 귤밭

소독 줄 잘 잡으라하고, 어둠 속 농약을 친 것

 

이기, 사랑이라예!" 그 길로 섬을 뜬 여자

한낮의 땡볕을 피해 더러 하는 농법인데

사랑도 들녘의 사랑은, 손발이 좀 맞아야

 

폭염暴炎 2

 

오천 평 8월 귤밭 농약을 혼자 치던

남원읍 신흥2리 귀농인歸農人 대머리 박씨

골백번 손 놓고 싶었단다 어지럽고 숨 막혀

 

~ 더는 못 하겠네진작 그 한계상황을

참고 또 참으며 기어이 다 끝낸 순간

두 팔이 저절로 번쩍 만세!” 소리 나더란다

 

기어이 해냈구나눈물도 핑 돌더래

운동 직장 목장 농장버둥댄 내 반생에

그토록 만세!” 한번을 외쳐본 적 있었나

 

폭염暴炎 3

 

어휴~ 훈이 아빠, 좀 쉬었다 합시다

저녁에 모임 있잖니, 빨리 하고 집에 가자

지친 소 멍에를 끌듯 끌고 끌던 그 소독줄

 

한참을 안 움직여, 웬일인가? 웬일인가!

벙어리 몸부림치듯 소독 대 혼자 뒹굴 때

그것이끝이었어요 그것이끝이었네요

 

지금도 귤밭에 서면, 무시로 이는 환영幻影

정녕 피할 순 없었나 그날 그 살의殺意의 햇살

보았지, 쉬면서 하게” “형님, 형님,” 저만치 웃는

 

 

                                 *강문신 시조집 해동解冬의 들녘(문학과사람, 2021)에서

                                     *사진 : 밭담 너머의 결실(202011월 추사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