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임채우 시집 '설문雪門'의 시(2)

김창집 2021. 10. 26. 00:30

보츠와나의 꽃

 

아프리카 남부 남아프리카공화국 위

해질녘 바오밥나무가 서 있는 풍경이 너무나도 고고즈넉한

생소한 땅 보츠와나로 이민 간 친구에게서

꽃 두 송이가 배달되었다

 

메마른 사막에 활짝 핀

나무도 줄기도 이파리도 없이 모가지만 똑 따서

황무지에 꽂아 놓은 듯한 이름 모를 꽃이

보는 이 없어도 야무지다

 

국토의 대부분을 차지한다는 거친 사막에

이맘때면 색깔도 선명한 야생화들이

쇠똥처럼 불쑥불쑥 솟아나

황무지를 수놓는다는 보츠와나

 

과묵한 고향 친구

하마 까마득히 이 땅을 떠나

몇 해 전 잠시 다니러 온 그에게 어떻게 사냐고 묻자

빙그레 웃으며 어디나 다 마찬가지여

 

이역만리 낯설고 물선 아프리카

망치 쥐고 구슬땀 흘려

홀로 뿌리 내린

사막의 꽃

 

 

왜 이런 것을 꾸는지 몰라

 

지리산 뱀사골에 물이 불어

칠흑 같은 오밤중 랜턴 빛 들쑤시더니

내 텐트로 기어들어 온

비에 홈빡 젖어 오돌오돌 떨던

눈이 째진 땅꾼 사내

 

내 안에 고개 쳐든

독사 대가리

 

왜 이런 몸서리쳐지는 것들이

다시 나타나는지 몰라

 

꽃도 꽃을 꺼리고

 

꽃들이 다투어 피어나자

삼척에선 노란 유채꽃밭을 갈아엎고

진해에선 벚꽃 명소에 바리케이트를 치고

여의도 윤중로는 버스정류장 일곱을 폐쇄했다

꽃들도 거리두기

꽃도 꽃을 꺼리고

(꽃은 바이러스가 아니다)

 

검은 새

 

강남 하고도 압구정동 뒷골목

숲 그림자 하나 없는 도시 한복판

비가 내리다 말다 잔뜩 찌푸린 날

전선이 얼크러진 전봇대 맨 윗줄

한 줌 검정으로 암세포처럼

허공에 뭉쳐 있는 새 한 마리

가끔 고개 숙여 부리로 깃을 헤친다

발밑에 흐르는 하오의 정적

외제 승용차 한 대 지나가고

난쟁이걸음으로 사람 하나 지나가고

언제까지 날 줄 모르고

살아 있다는 듯이 움찔하고

 

느티나무

 

  어른 장딴지만 한 밑동에 몇 줄 그늘이 눈부신 너는 항상 제자리에 풍경으로 서 있다. 오늘도 참새며 까막까치 날아들고 노곤한 길고양이가 잠시 그늘 아래 머물다 갔다. 하루해를 넘기고 지친 몸으로 내 나무 아래 파고들면 귀때기만 한 이파리들이 어찌나 팔랑대는지. 고향 강가에서 예쁜 조약돌을 줍듯이 언어를 고르노라면 느티나무, 너는 언제나 나에게 환호를 보낸다. 네 작은 그늘에 의자 하나를 가져다 놓겠다. 가끔은 거기에 앉아 노을에 물들어 새들의 귀소를 바라보고 싶다. 나그네도 쉬어 가리라.

 

풋대추 물들다

 

늘어진 대추나무

한여름 폭염 지나

폭우 며칠

새벽이슬 고스란히 젖더니

한쪽이 발그레하다

 

풋내 나는 소녀야!

아무리 교복 스커트 자락 추어올리고

얼굴에 분칠하고

입술을 빨갛게 덧칠해도

상큼한 미숙은 감출 수가 없구나

 

 

                                         *임채우 시집 설문雪門(우리, 2021)에서

                                             *사진 : 사람주나무 단풍(2021. 10. 24.)

 

   ♧ 갑자기 추워진 날씨로 보아서 단풍이 제법 들었겠지.’ 하며 한라산 관음사 동쪽 숲으로 가 보았다. 하지만 아직도 단풍나무를 비롯한 초록 숲은 변함이 없는 가운데, 이 사람주나무만 약간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한라산에는 벌써 상고대가 한 차례 내렸는데, 이곳은 600m 이하 고지여서 아직 가을 전령이 다녀가지 않았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