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제주문학' 2021년 가을호의 시조(1)

김창집 2021. 10. 27. 00:18

비밀의 문 - 김연미

 

거미줄에 매달려 절벽을 터치해 볼까

이슬로 짠 그물에도 걸리지 않는 시간을 타고

왕거미 낙법을 익혀 저 암호 풀고 싶다

 

일출봉 동쪽 벼랑 지문 인식 센서를 만든

애초에 우린 모두 거인족의 후예

내 작은 손바닥 안에 비밀키가 있었지

 

오천 년 된 불의 성 그 문 열고 들어서면

흰머리 설문대할망 나를 반겨 맞아줄까

빨래판* 그대로 두고 신화에서 사라졌던,

 

태초에 약속된 시간 지금일지도 몰라

36.5도에서 자물쇠 풀리는 소리

닫혔던 문이 열린다. 바다 출렁 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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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대할망 신화에서 우도는 설문대할망이 빨래하던 빨래판.

 

먼 데서 오는 여자* - 김영란

 

  잊어야 산다고 살다 보면 살아진다고 내가 날 잊으면 당신이 당신 잊으면

 

  산 사람은 살아야지요 기억하겠다는 사람들, 입을 막아 버려야 합니다 살아남는 데 아무런 도움도 안 돼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애들한테, 이 사실을 똑똑히 알려 줘야 합니다 아무도 믿지 마, 살고 싶거든, 아무도 믿지 마 사람을 믿지 마 니 애비도 에미도 믿지마! 니가 죽든 말든 아무도 신경 안 쓴다 너도 신경 쓰지 마! 약해 빠진 놈들이 죽는 거야 살고 싶으면 이를 악물고 뛰어 살아 있을 때까지는 뛰어 살고 싶으면 뛰어, 도망쳐! 달아나!**

 

  먼 데서 아주 먼 데서 슬픔이 말을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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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지하철 참사를 주제로 한 연극.

** 연극 먼 데서 오는 여자에 나오는 대사.

 

성산포빵 금옥언니 김영숙

 

쏨벵이 독가시 같은 바람을 품은 여자

 

일대말대 그녀의 하루 늘 파란 지느러미

 

허스키 성산포바다 안고 사는 동읫 여자

 

코로나 일기 5 김정숙

   -작아 격리

 

소소한 즐거움이 몸을 부풀리는 동안

꽃 피면 바람 불면 나풀거리던 순서를 접고

옷장 속 내 분신들이 하릴 없이 지낸다

 

우리가 못 보는 사이 바람난 저 사이즈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거라고

이러다

사람향기가

잊혀질까 두렵다

 

두더지게임 긴진숙

 

반전을 가르친 건 불친절한 세상일 거야

 

연달아 내리쳐도 솟아나는 결심처럼

 

절대로 죽지 않을 걸, 절대로 지지 않아

 

여름 숲 칵테일 오영호

 

숲속

나무마다

팔랑이는 녹색 잔에

 

편백 향 큰 한 술 들꽃 향 반 큰술 섞어

 

마시자

내 그을린 곳간

샘물처럼 닦아내는

 

 

                 * 계간 제주작가(2021 가을호)에서

                 * 사진 : 가을 들꽃 - 차례로 물매화, 참취, 산부추, 쥐꼬리망초, 당잔대, 꽃향유, 쑥부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