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김병택 시집 '벌목장에서'의 시(2)

김창집 2021. 10. 28. 00:44

 

가을 삽화

 

내 눈자위에 꽤 오래

머물고 있던 가을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내 손을 잡고

붉은 바다로

조용히 뛰어든다

주위엔 햇살이 굴러가는

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산을 오르던 사람들이

가을과 함께

붉은 바다에서

헤엄치고 있는 나를

웃으며 바라본다

 

 

가을의 산책

 

거리의 큰 낙엽 수목들이

산책하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늙수그레한 사내 둘이

쉰 소리로 이야기하며

내 옆을 지나갈 때는

하마터면 나도 그들의

이야기에 끼어들 뻔했다

 

나무 잎새 주위에 모인

바람이 오늘은 어제보다

더 큰 물결 소리를 낸다

 

붉은 단풍이 늦은 저녁을

더 짙게 물들이는 사이

 

조금씩 떨어진 기운이

차가운 비를 몰고 온다

 

비를 맞으며 어디까지

산책할 것인지를

빨리 정하지 못한다

 

나도 낙엽 수목들처럼

산책하는 사람을 바라본다

 

 

바라보는 아침

 

사그라지지 않는 어둠을

잘게 깨뜨리며

시간의 항로에 맞추어

임무를 다하듯 찾아온다

 

아쉬운 마음으로

밤에 지은 한 채의 집을

막 허문 뒤에야 만난다

 

아득한 지난 밤에

슬며시 찾아왔던 옛날을

다치지 않도록 기억한다

 

지붕에는 어김없이

길고 긴 바람이 지나가고

마당에 서 있는 나무들은

감시자처럼 숨죽인다

 

 

족보 읽기 1

 

희미하게 빛나던 옛날의 영광도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던 고통도

이렇게, 몇 줄의 기록으로 남을 뿐

세상을 차지하고 솟아오르던 기쁨이

칼로 베이는 듯했던 이별의 아픔이

생애를 지시하는 기호들 옆으로

굴레에서 벗어나듯 비끼며 다가선다

 

수평으로 배열한 이름들을 넘어

아래쪽 칸으로 시선을 돌려 본다

불확실한 생몰년의 미망 때문에

아직도 완성되지 못한 이름들이

항렬, 항렬자의 행렬에 맞추어

열병하는 나를 응시하고 있다

 

할아버지들, 배위配位 할머니까지

허름한 이념들, 질긴 허위들까지

마침내는 내 눈 그물에 들어오겠지만

, 무자식 조상에 부딪히기라도 하면

누구를 만날 때보다도 더 크게 일렁일

싸늘함과 마주할 수밖에 없을 터이다

 

 

가정假定

 

  초가집 뒤뜰 대나무 숲을 지나는 바람이 늘 귓가에 맴돌지 않았다면, 해마다 꽃 피우는 멀구슬나무의 잎새들 사이로 길고 긴 햇살이 흐르지 않았다면, 집 앞에 펼쳐진 바다가 날마다 밀물과 썰물로 바뀌지 않았다면, 일요일 아침 멀리 떨어진 교회의 종소리가 지붕을 넘어 마당까지 찾아오지 않았다면, 열기구를 타고 올라간 공중에서 구름과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면, 미물들이 안식하는 여름의 자정 시간 쏟아지는 수백 개의 별과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면, 나는 분명 지금도 어디를 향해가고 있을 것이다

 

 

                                        * 김병택 시집 벌목장에서(새미, 2021)에서

                                                    * 사진 : 이른 가을 단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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