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이대흠 시집 '귀가 서럽다'의 시(5)

김창집 2021. 10. 30. 00:31

나이 드신 아이님이 말씀하시길

 

미얀마의 한 섬에서는

나이를 먹을수록 나이가 줄어든다

태어나 일 년이 된 아이는 예순 살이 되고

해가 바뀔 때마다 나이 한 살씩 푸는 것이다

 

  쉰일곱이신 아이님이 놀이방에 다닐 때였다 아이님은 잡다한 물건들을 가방에 넣고 다녔다 그 가방에는 시계며 카메라, 인형이나 장난감 총은 물론이고 청소기 필터나 손톱깎이 같은 것이 가득했다 한번은 집 열쇠까지 넣고 가는 바람에 곤혹을 치르기도 하였다

 

  어느 날 아침 아이님의 가방에는 드라이버며 스캐너 면도기까지 들어 있었다 내가 들기에도 무거워 몇 가지를 꺼내놓으려 하자 안 된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공부한다고 앉아 있는 내게 와서 구겨진 휴지조각 하나를 자신의 가방에 넣어달라고 하였다 나는 영문을 모른 채 그것을 넣어주며 이것들이 도대체 뭐예요? 물었다 아이님은 망설임 없이 책이라고 했다

 

황영감의 말뚝론

 

생땅은 말이여 말하자면 처녀진디

그라고 쾅쾅 친다고 박히는 것이 아니여

힘대로 망치질하다간 되레 땅이 썽질 내부러

박혀도 금방 흐물흐물해져불제

박은 듯 안 박은 듯 망치를 살살 다뤄사제

실실 문지르대끼 땅을 달래감서 박어사

땅이 몸을 내주제

그라다 인자 조깐 들어갔다 싶으면

그때부텀 기운대로 치는 거여 아먼

그라고 박힌 말뚝이라사 썩을 때까장 안 뽑히제

그래사 말뚝이제

 

달팽이

 

검고 뭉툭한 껍질을 끌고

달팽이 한 마리 바닥을 기어간다

보도블록의 잔 틈도 손톱만한 돌조각도

그에겐 난간이다

길게 몸 빼어 튀어나온 촉수를 허우적거리며

기어가는 그

사람들은 길의 일부만 디디며 성큼성큼 앞질러가고

그는 한사코 길의 체온을 몸에 담으려는 듯

온몸으로 바닥을 껴안고 간다

울어 촉촉한 촉수를 하늘 향해 치켜세우고

두려운 듯 그러나

아무리 거친 길이더라도 아프더라도

기어이 헤쳐 가는 그

딸랑거리는 동전 그릇을 버겁게 밀며

십이월 언 나뭇가지 같은 차가운 길을

절하며 고개 조아리며 나아가는 달팽이 한 분

 

손금

 

  손금을 봐준다고 그녀의 손을 잡고 앉아 손금은 보지 못하고 이리저리 헝클어진 세월을 보았습니다 각목 같은 팔뚝에 남아 있는 상흔들 못자국 같았습니다 손금은 도무지 보이지 않고 잘린 엄지와 굳은살만 보였습니다 지문 없는 그녀의 손끝 반질반질 잘 닦여 있었습니다 손바닥 가득 뻗어나간 기름때 잔뿌리 무성히 뿌리내리고 있었습니다

 

룽에게

 

소리에 갇혀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는

물속 돌멩이 같은 삶도 있는 것이다

 

그 돌멩이의 부드러운 그늘 같은 울음도 있는 것이다

 

 

                                      * 이대흠 시집 귀가 서럽다(창비, 2010)에서

                           * 사진 : 반딧불이 날던 그날 밤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