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임채우 시집 '설문雪門'의 시(4)

김창집 2021. 11. 11. 00:37

1

 

한 그루 내 나무라 하면 안 되나, 너를

천년을 기다려 죽음의 그림까지 내준

바오밥나무라고 하면 안 되나, 너를

새들이 지저귀며 들락거리고

바람 불어 스산한 가지에

오랜 기다림으로 붙박여

환하게 타오르는 너를

 

누구는 운명이라 했고

누구는 절박이라 했고

누구는 허물이라 했다

 

아프다고 엄살깨나 부리고

허섭스레기 같은 나날을 참회하며

너무 경건치 않아 곰살맞은 친구 같은 너를

내 나무의 나이테라 하면 안 되나, 너를

 

시라 하면 안 되나?

 

2

 

한 줄기 바람인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도둑고양이처럼 다가와

 

다급하게 문 두드리는 소리

신발 끌며 나오는 소리

 

처음엔 겨자씨만 한 기미였다가

대지를 뚫고 솟아나는 여린 떡잎

 

곁가지 틀어 우거진 사유의 둥지

새들도 들락거리는 초록의 물결

 

한 줄기 바람인가 물결인가

없는 듯 돌아서는 너의 뒷모습

 

가창오리 떼

 

천수만은 가창오리 떼 난민수용소

시베리아에서 이고지고 만릿길

누구 하나 이끄는 자 없이도

일사불란하게 날아든다

 

거친 바다로 뛰어드는 인간들이 있다

이들을 등쳐먹는 브로커라는 족속도 있다

이들이 사력을 다하여 천수만에 닿아도

뱃머리를 바다로 돌리는 텃새가 있다

 

두 눈 부릅뜨고 총칼을 들이대고

가시철망을 넘어야 천수만이다

가창오리는 여권도 비자도 세관도 없다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무정부주의자

 

점점이 가창오리 떼 지어 날며

신께 바치는 차가운 불꽃의 제전

무엇이 우리를 숨막히게 하는가

무엇이 우리를 주저하게 하는가

 

대자연의 향연에 귀 기울여 보라

가창오리 떼 지어 소리비가 내리고

화려한 군무에 탄성을 쏟아내는

입 다물 줄 모르는 인간들을 조롱한다

 

겹치다

 

경칩 지난 봄 뜰

겨우내 얼었다, 녹았다, 산수유 검붉은 열매

발 시린 새들에게 몸 보시하더니

메마른 등걸에 점점이 찍힌

노란 꽃 몽우리

 

고인 웅덩이에 새 물 들이듯

 

묵은 것들 한방에 일소하는 것이 아니라

피 흘려 혁명하자는 것이 아니라

 

설날 본댁에 모처럼 대가족이 모여

왕할머니 품이 낯설어 쭈뼛거리는 증손자처럼

몇 남은 검붉은 쭈그렁 열매와

산수유 뽀얀 꽃 몽우리가

풍경 하나로 겹치는구나!

 

황사

 

밤새 들쑤시던 황사가

창가에 노곤한 기색으로

서성대는 아침

 

검은 새 한 마리

아파트 단지를 가로질러

이윽고 사라졌다

 

서울은 반나절 길

 

누가 세상을 버렸다는

소식이 들렸다

 

역사

 

  이이화 선생의 동학농민사2권 중간에

  춘추필법의 무색치 않은 노대가의 형형한 눈빛

  간담이 서늘한 서늘한 대쪽 같은 목소리

 

  박제순은 뒷날 을사오적이 되어 친일파로 전락했고, 총리대신으로 농민군 토벌에 동조했던 김홍집은 광화문 앞에서 군중에게 맞아 죽었으며, 양호선무사로 활동했던 어윤중은 도망치다가 백성들에게 몽둥이찜질을 받고 죽었다. 일본군을 지원하고 농민군을 섬멸해 달라고 요청한 외무대신 김윤식은 평생 눈치를 보다가 오욕의 삶을 마감했고, 박영효는 갖가지 친일 주구 노릇을 하면서 떵떵거리며 살다가 민족반역자로 낙인이 찍혔다.

 

  역사의 엄정함이여!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그물망이여!

 

 

                                 *임채우 시집 설문雪門(우리, 2021)에서

                                   *사진 : 마다가스카르의 포니 바오바브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