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고정국 시집 '백록을 기다리며'의 시

김창집 2021. 11. 13. 00:18

 

백록(白鹿)을 기다리며

 

해발고지 높아질수록 나무들은 진솔했다

한두 개 명치에 박힌 상처 자국을 내보이며

낮은 키 낙엽수들이 내게 옷을 벗으란다.

 

비정규직 일터 같은 한겨울 이 잡목 숲

관목들 등골이 휜 성판악 등산로 따라

한때 그 위풍 떨쳤던 잔해들이 보이고.

 

지엔피 이만불입네, 시인들도 다 뜬 지금

어느새 나의 글에도 기름기가 끼었다며

뼈뿐인 박달나무가 궁체 붓을 세운다.

 

더 큰 만남을 위해 어둠을 깊게 하라

빽빽한 설산에서 제 뿔이 하얗도록

묵묵히 백록(白鹿)을 기다린 초목들이 고마워.

 

 

안개지대

 

  모처럼 진실이라던 실선(實線) 다 무너지고, 소수점 이하 언어들이 가지 끝에서 눈물 맺힐 때 우리는 깜박이 켜고 저문 길을 나선다. 시대의 바른 대답을 안개 속에서 찾을 거라며 축축한 손길 위로 촛불 받아든 달맞이꽃 무작정 끌고 온 길들이 평지에서 더디다. 허락하지 않은 길에도 샛길 하나 숨겨둔다는 고독한 산보자의 그 우울한 윤곽 밖으로 초록 빛 화살표 하나가 걱정스레 찍힌다.

 

 

그리운 별꽃

 

  북두칠성 꼬리쯤에서 저만 슬쩍 떨어져 나와 연애 한 번 못해 보고 다시 별이 되었다는, 빵모자 성긴 치아가 어쩜 너였는지 몰라.

 

  꽃들의 겨울여행엔 일박 이일이 짧았나 봐. 한겨울 텃밭 같은 내 시첩의 행간에서 섧도록 깜박거리던 그 별자리, 그 별꽃.

 

  볼수록 천치 같다는 꽃 한 송이 만나기 위해 대낮에도 반 촉짜리 등을 켜 두는 그대, 오늘은 우리 텃밭에 별이 몽땅 내려와 있네.

 

 

산방의 휴일

 

  꽃향유 약불에도 가을산은 펄펄 끓었고 이별을 예감한 꽃들이 다투어 입을 맞췄네, 발등에 루즈 자국이 고백처럼 아팠네.

 

  입산통제구역에 길이 하나 숨어있었네. 예쁜 발자국이 이쯤에서 시작되었고 마지막 절정을 치르는 풀여치, 풀여치 소리.

 

  바람이 어깨 너머 음풍농월의 시를 읊네. 묵묵히 쇠똥구리가 오름 하나를 굴리고 있을 때 사내는 바짓가랑이 도꼬마리 씨를 뜯네.

 

 

시월의 빛

 

  이별에 익숙한 자의 살짝 붉힌 눈시울처럼 낙엽을 준비하는 갱년기의 관목들처럼 비로소 몸으로 말하는 시월 한국, 저들이 곱다. 표정이 밝은 것만큼 제 슬픔도 깊었다는 구절구절 구절구절 멍투성이 구절초가 푸르게 삭발을 하고 종일 저렇게 웃는 걸 봐.

 

  봄여름 다 지나도 안색 한 번 바뀐 일 없어

  떠날 때 임박해서야 말문 여는 고추잠자리

  멍석에 쏟아낸 진실이

  몸빛보다

  더

  부셔.

 

 

돌고래가 산다더라

 

가끔씩 맨발로 와서 물수재비 뜬다더라

바위에도 젖을 물리는 포유동물이 산다더라

만발한 국화밭 가꾸며 동해바다가 산다더라.

 

한 생애 열 길 물 속 벽을 향해 돌아누우며

늦도록 굽은 허리로 자맥질 돕던 바다

나선형 슬픔을 감추며 늙은 고래가 산다더라.

 

강강술래, 강강술래 독도리 산 1번지

정강이뼈를 깎으며 섬이 혼자 산다더라

정한수 놋그릇머리엔 초록등을 켠다더라.

 

동체(同體)로 곤두박질치는 절망이여 빛이여!

등푸른 백두대간에 밀고 당기는 물갈퀴여

돌아와 자유를 가꾸며 사람들이 산다더라.

 

 

                                * 고정국 시집 백록을 기다리며(연인M&B, 2008)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