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월간 '우리詩' 2021년 11월호의 시(2)

김창집 2021. 11. 9. 00:19

새벽 박광영

 

오솔길을 걷다

정수리쯤 걸려 있는 거미줄

 

밤새,

냉한 가슴만 움켜잡았나

이슬방울로 가득하다

 

생은,

빈털터리

서툰 투망질에도

빛나는 때가 있다

 

바닥론 - 김혜천

 

살만한 내일이 펼쳐질 거라는 믿음은

잠시 일었다 스러지는 포말

 

추락의 덧없음이 예고도 없이 찾아와

날개 접힌 채 수직으로 우는 새

 

늪에 빠져 허우적대 본 사람은 안다

바닥이 기어이 오르고픈 꿈이라는 걸

 

몸부림쳐 바닥에 올라서 본 사람은 안다

수없이 짓밟힌 바닥은 견고하다는 걸

다음 층계로 오를 수 있는 디딤돌이라는 걸

딛고 솟구쳐 넘을 수 있는 허들이라는 걸

 

바닥에 바닥바닥 체화된 사람의 몸은 가볍다

다 잃고 깡통이 된 그 때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최적의 상태이다

 

그러므로 바닥은

끝이 아니라

스스로 이룩한 단단한 배경이다

 

내 슬픔은 장우원

 

내 슬픔은

백마부대에서 왔는지도 모른다

 

백마부대를 제대한

막내 외삼촌인지도 모른다

 

백마가 새겨진

월맹군 토벌 사진인지도 모른다

 

따이한이 밟고 섰던

그 땅 냄새인지도 모른다

 

외가 골방에서 보던

파월장병 가족에게 온 홍보물

그 속 어딘가 숨어 있을 막내 외삼촌

 

죽음을 알기도 전

내게 죽음을 안긴

내가 닮은 눈빛

 

내 슬픔은

귀국 한 달 뒤

 

영산강 두루미를 따라간

막내 외삼촌인지도 모른다

 

자목련 꽃잎이 되어 - 배한조

 

겨울 산을 벗어나 거리를 유영하는 사람들

꽃분홍 진달래꽃으로 피더니, 오늘은 벚꽃이 되었다.

어느새 마지막 남은 자목련 꽃잎 하나가

가지 끝에서 떨어질까 말까,

아래를 내려다보며 아슬아슬한 저울질을 하고 있다.

 

매화꽃이 스러져 가는 날

병원 응급실로 들어가

세상사 겉치레는 다 벗어버리고

온몸에 새 장식을 주렁주렁 달고

명줄을 잡을까 놓을까

흐릿한 안개속의 나락으로 언제

떨어질지도 모르는

자목련 꽃잎이 되었다.

 

어디서 왔는지, 누구인지도 모르는 수액은

가는 비닐 관을 타고 저승사자처럼

소리 없이 들어와 주인 행세를 하며

허물어져 가는 토담집을 마구 헤집어 놓는다.

황태처럼 건조해지는 혀, 말라가는 의식,

애타게 그리는, 하소연 들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꿈결같이 지나치는 백의의 사람들은

물 한 방울의 자비도 바랄 수 없는

로봇처럼 딱딱하고 차디찬 피부를 가졌다

 

황태 입속에도

순한 바람과 속살처럼 따스한 봄비라도 내려준다면,

그 비에 토담집은 허물어져도

촉촉이 젖은 미소 띤 자목련 꽃비로 내려

고개 돌려 뒤돌아보지도 않고

저 대지 어느 곳에 고요히 스며들 텐데

 

그게 무어라고 - 이수미

 

더러운 세상에서 나 혼자 고상한 척

 

밀물처럼 달려오는 그대를 애써 밀쳤는데

 

영영 다시 볼 수 없을 줄 알았더라면

 

손이라도 한번 내밀어 볼 것을

 

눈 한번 맞추고 손 한 번 잡는 것이

 

그게 무어라고

 

그게 무어라고

 

뒤뜰에서 - 임채우

 

  아파트 뒤뜰에서 두 소년이 배드민턴을 친다. 라켓을 처음 잡아 보는지 한껏 뒤로 휘둘러 셔틀콕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거나 상대방 머리 위로 날려버린다. 그들의 힘겨운 노동은 단 두 번의 랠리도 주고받지 못한다. 나중에는 상대방을 골탕 먹이려고 일부러 받기 힘든 곳으로 깃털을 보내는 것 같다. 그리고는 서로에게 잘못을 돌리고 짜증을 내고, 어디선가 많이 본 풍경이다. 두 소년은 이내 시들해지며 판을 접어버린다. 뒤뜰이 조용하다.

 

 

                                               * 월간 우리202111월호에서

                                                       * 사진 : 산호의 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