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강덕환 시집 '그해 겨울은 춥기도 하였네'의 시

김창집 2022. 4. 1. 00:06

 

달여도에서

 

먼 데서야 하나로 보일 테지만

아니다, 여럿이서 어깨를 겯고

드러나기도 하고 은밀히 잠겨 있기도 하다

마주한 수평선의 선두에서

거친 파도는 으랏싸! 배지기로 넘기고

결 고운 파도는 가슴으로 받아

옹기종기 모인 바닷가 마을로 달려갔다

가서는 온갖 생명 낳고 키웠건만

 

그 마을에선 한 날 한 시에

불을 지르고, 사람들을 죽였다

섬이 애써 길러 온 마을이

한순간에 쑥대밭이 되었다

 

한라산을 병풍으로 치고

지붕 맞댄 집들로 제수祭需 삼아

차려진 제상 앞 달여도는

초석이다 초석에 엎드려 절을 하고

수백 번 비워 낸 개잔술에

나는 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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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여도는 4·3당시 집단학살을 당한 북촌마을 앞의 자그마한 섬이다.

 

 

 

불 칸 낭

 

아직, 살아 있습니다

터진 무르팍 또 터져

덧대어 기운 틈새로 찬바람

간섭해도 버티어 있습니다

 

삭신이야 온전할 리 있겠습니까

정처 없는 동백 씨앗

겨드랑이 타올라 뿌리 뻗고

담쟁이 목줄에 감겨 와도

모두 아울러 살아갑니다

 

집이건, 연자방아간

깡그리 무너지고

동굴 속으로 숨어든 사람들마저

다시 못 올 길 떠난 자리에

방홧불에 데인 상처

아물지 못해 옹이로 슴배인

마을의 허한 터에 서서

끝내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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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천읍 선흘마을 안에는 4·3 당시 가옥들이 소각당할 때 함께 타다가 남아 살아있는 나무가 있다.

 

 

 

들불축제

 

축제는 끝났다, 바람이 낸 길을 따라

불이 흐르던

무자년 동짓달 열사흘

차마 여물지 못한 보름달빛

그 때도 대나무 울타리

우물가에 살포시 내려앉았을까

 

피할 재간도 없이

거대한 불줄기는

와드득와드득 안간힘으로

교래리 벌판

삼킬 것 다 태웠다 여기지만

 

잿더미 비집고

뿌리에서 길어 올린 분노

자양분으로 삼아

억새 순 삐죽이 고개를 내미는 사이

할미꽃, 아직은

작은 몸짓일지라도

저승 갈 노잣돈 마련할 수 있겠다

 

 

 

박태기꽃

 

살갗 거죽 걷어내어

안간힘으로 꽃불을 피워 올리다가

 

아예, 온 몸으로 저항하는

사월의 진홍빛 하혈을 보게나

 

한 줌이 아니네

서너 줌도 아니네

무더기, 무더기로 흘리다가

 

큼직한 사랑의 이파리

아픔 끝에 매달아 두고

사태 때 숨져간

얼굴 모른 양고모님

 

 

 

동백꽃

 

초봄, 아직 일러

돋지 못한 순도 많은데

서두른 탓일까, 꽃봉오리

시들 채비도 없이

삽시에

모로 떨어져

신열로 뒤척이는 꽃

 

 

 

잃어버린 마을

 

  수목원 나무 그늘 평상에 누웠다가, , 글쎄 시끄러운 매미 탓에 자리를 옮기는데, 나무 밑둥에 살그랑이 남아 있는 매미의 둥지를 보았지요 떠나버린 집터만 옹송그리고 있었던 거지요 멀리 떠난 매미는 기억하고 있을까, 돌아올 수 있을까

 

  적꼬치로 쓰던 뒤란의 대나무 숲은 서걱이는데, 풋감 즙을 내어 갈옷에 물들이던 감나무의 노동은 시퍼렇게 살아 있는데, 어쩌자고 무자년의 흔적 지우지 못하고 버팅겨선 팽나무 너는

 

  떠난 게 아니라 밀려난 거지요 잊은 게 아니라 꽁꽁 저며 두고 있던 거지요 잃어버린 게 아니라 빼앗긴 거지요

 

  쉽게 어스러지는 탈피의 잔해를 엉거주춤 밟고 선 나는 다만, 우화등선羽化登仙을 빌 뿐

 

 

                           * 강덕환 시집 그해 겨울은 춥기도 하였네(풍경, 2010)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