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달여도에서
먼 데서야 하나로 보일 테지만
아니다, 여럿이서 어깨를 겯고
드러나기도 하고 은밀히 잠겨 있기도 하다
마주한 수평선의 선두에서
거친 파도는 으랏싸! 배지기로 넘기고
결 고운 파도는 가슴으로 받아
옹기종기 모인 바닷가 마을로 달려갔다
가서는 온갖 생명 낳고 키웠건만
그 마을에선 한 날 한 시에
불을 지르고, 사람들을 죽였다
섬이 애써 길러 온 마을이
한순간에 쑥대밭이 되었다
한라산을 병풍으로 치고
지붕 맞댄 집들로 제수祭需 삼아
차려진 제상 앞 달여도는
초석이다 초석에 엎드려 절을 하고
수백 번 비워 낸 개잔술에
나는 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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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여도는 4·3당시 집단학살을 당한 북촌마을 앞의 자그마한 섬이다.
♧ 불 칸 낭
아직, 살아 있습니다
터진 무르팍 또 터져
덧대어 기운 틈새로 찬바람
간섭해도 버티어 있습니다
삭신이야 온전할 리 있겠습니까
정처 없는 동백 씨앗
겨드랑이 타올라 뿌리 뻗고
담쟁이 목줄에 감겨 와도
모두 아울러 살아갑니다
집이건, 연자방아간
깡그리 무너지고
동굴 속으로 숨어든 사람들마저
다시 못 올 길 떠난 자리에
방홧불에 데인 상처
아물지 못해 옹이로 슴배인
마을의 허한 터에 서서
끝내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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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천읍 선흘마을 안에는 4·3 당시 가옥들이 소각당할 때 함께 타다가 남아 살아있는 나무가 있다.
♧ 들불축제
축제는 끝났다, 바람이 낸 길을 따라
불이 흐르던
무자년 동짓달 열사흘
차마 여물지 못한 보름달빛
그 때도 대나무 울타리
우물가에 살포시 내려앉았을까
피할 재간도 없이
거대한 불줄기는
와드득와드득 안간힘으로
교래리 벌판
삼킬 것 다 태웠다 여기지만
잿더미 비집고
뿌리에서 길어 올린 분노
자양분으로 삼아
억새 순 삐죽이 고개를 내미는 사이
할미꽃, 아직은
작은 몸짓일지라도
저승 갈 노잣돈 마련할 수 있겠다
♧ 박태기꽃
살갗 거죽 걷어내어
안간힘으로 꽃불을 피워 올리다가
아예, 온 몸으로 저항하는
사월의 진홍빛 하혈을 보게나
한 줌이 아니네
서너 줌도 아니네
무더기, 무더기로 흘리다가
큼직한 사랑의 이파리
아픔 끝에 매달아 두고
사태 때 숨져간
얼굴 모른 양고모님
♧ 동백꽃
초봄, 아직 일러
돋지 못한 순도 많은데
서두른 탓일까, 꽃봉오리
시들 채비도 없이
삽시에
모로 떨어져
신열로 뒤척이는 꽃
♧ 잃어버린 마을
수목원 나무 그늘 평상에 누웠다가, 하, 글쎄 시끄러운 매미 탓에 자리를 옮기는데, 나무 밑둥에 살그랑이 남아 있는 매미의 둥지를 보았지요 떠나버린 집터만 옹송그리고 있었던 거지요 멀리 떠난 매미는 기억하고 있을까, 돌아올 수 있을까
적꼬치로 쓰던 뒤란의 대나무 숲은 서걱이는데, 풋감 즙을 내어 갈옷에 물들이던 감나무의 노동은 시퍼렇게 살아 있는데, 어쩌자고 무자년의 흔적 지우지 못하고 버팅겨선 팽나무 너는
떠난 게 아니라 밀려난 거지요 잊은 게 아니라 꽁꽁 저며 두고 있던 거지요 잃어버린 게 아니라 빼앗긴 거지요
쉽게 어스러지는 탈피의 잔해를 엉거주춤 밟고 선 나는 다만, 우화등선羽化登仙을 빌 뿐
* 강덕환 시집 『그해 겨울은 춥기도 하였네』 (풍경, 2010)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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