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74주년 4.3 희생자 추념일입니다.
♧ 무명천 할머니
-월령리 진아영
한 여자가 울담 아래 쪼그려 있네
손바닥 선인장처럼 앉아 있네
희디 흰 무명천 턱을 싸맨 채
울음이 소리가 되고 소리가 울음이 되는
그녀, 끅끅 막힌 목젖의 음운 나는 알 수 없네
가슴뼈로 후둑이는 그녀의 울음 난 알 수 없네
무자년 그 날, 살려고 후다닥 내달린 밭담 안에서
누가 날렸는지 모를
날카로운 한발에 송두리째 날아가 버린 턱
당해보지 않은 나는 알 수가 없네
그 고통 속에 허구한 밤 뒤채이는
어둠을 본 적 없는 나는 알 수 없네
링거를 맞지 않고는 잠들 수 없는
그녀 몸의 소리를
모든 말은 부호처럼 날아가 비명횡사하고
모든 꿈은 먼 바다로 가 꽂히고
어둠이 깊을수록 통증은 깊어지네
홀로 헛것들과 싸우며 새벽을 기다리던
그래 본 적 없는 나는
그 깊은 고통을 진정 알 길 없네
그녀 딛는 곡마다 헛딛는 말들을 알 수 있다고
바다 새가 꾸륵대고 있네
지금 대명천지 훌훌 자물쇠 벗기는
베롱한 세상
한 세상 왔다지만
꽁꽁 자물쇠 채운 문전에서
한 여자가 슬픈 눈 비린 저녁놀에 얼굴 묻네
오늘도 희디흰 무명천 받치고
울담 아래 앉아 있네
한 여자가 (2003)
♧ 울멍 마농 먹듯*
-고내리 홍 보살님**
말할 수 있을 때 말하리
왜 이리 살았느냐 묻지 마라
왜 홀로 사느냐 묻지 말라
손엣 가시 하나도 상처라는 세상
내 나이 스물다섯, 광기 어린 쇠좆매 후려쳐도
거듭 거듭 이름 불지 않았다
거꾸로 매달려 물벼락 육신 젖어도
결단코 지목하지 않았다
피못 박힌 가슴
무자식 청상에 눈물 바람 일어도 시어미 몰랐다
보리 훑고 미녕 지을 때
바늘땀에 내 눈물 꿰고 있던 것을 누구도 몰랐다
재 묻은 옷 벗을 날 없던 설운 청상
마실 가던 날 기억하지
시어미 몰래 무명 저고리 가슴에 품고 갔던
산중허리께 넘어서야 그 옷 살짝 바꿔 입던
스물셋 사상도 모른 저 남편
지금도 절집 후원 한 칸 머리맡에서 흑백으로 웃고 있는
목포형무손지 어딘지 모르나 행불이라지
맨 처음 10년 세월 삽작문 방싯해도
가슴 설령였다 행여 내 사랑인가
바람 없는 날에도 대문소린 왜 그리 허걱댔나 몰라
와다닥 가슴 깨지는 소리로 들렸는가 몰라
보름 이운 달빛 한 그리매 어른거려 나가 본다
그대 없는 먹구슬낭, 그 아래서 왈칵 북받쳤다
바람길로 오시나
바닷길로 오시나
가슴벽 파고 도는 숯등걸 달래며
울멍 마농 먹듯
그 소리 지나온 법당 사십 년
새벽 3시 예불에 몸을 달랬다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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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며 마늘 먹듯
*갓 결혼해 제주시 오라동에서 살다 4․3 당해 남편 행방불명. 2003년 81세.
♧ 1995년 8월 26일, 현정생 할머니*
성산포 오조리 한칸 초가
삐걱거리는 툇마루, 그 아래 싸리비 매달려
매달린 그 귀퉁이로
고집스레 늙어가는 둥근 바다엣 것 하나
칼바람 소리 내며 둥둥
바다 위를 쓸며 그렁그렁 쉰기침 소리 내고 있다
그 둥근 소리 흔들거리는 그녀의 집
그물망 촘촘히 거미의 집 짓는 소리 듣는 그녀
아흔다섯인가 여섯인가 아직은 희미하지만
그 셈이 무슨 상관이람
어린 것 열셋 놓고 반타작했다는
그 생애의 그물코 아래서
이젠 서슴없어라 왈랑왈랑 드러내도 부끄럽지 않네
무말랭이 같은 묵은 젖가슴
“이것이 그래도 스물 댓 살 적엔…
핏댕이 놓자마자 떨궈놓고
물질 나설 땐 가릴 게 없었주”
탱탱 밀빵처럼 부풀어 멀건 젖살
벙그렇게 바다에 뿌렸다네
물릴 데란 오직 빈 몸 받아주는 바다뿐
젖살 스물 살
물오른 오지항아리만한 가슴엣 젖
한 번에 여섯 차례 들락날락, 숨 팔고 숨 열어
풀고 풀어 놨으니 아흔다섯 생
현무암 각질처럼 굳은 살
지금도 아른거린다
아깝고 아까워라
그녀 쥐어 짠 젖살 먹고 저 바다 지금도
통통 살 올랐겠거니
해초가 먹고 수초가 먹고 풀풀 자랐겠거니
바닷물에 씻길 대로 씻겨져
대천바다로 흐르겠거니
이젠 누구하나 딱딱하게 굳은 살 모른 척할 뿐이라네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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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읍 오조리에서 평생 해녀로 살면서 자식들 키웠다. 1995년 96세.
*허영선 시집 『뿌리의 노래』 (당그래, 2004)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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