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람과 색 그리고
정오의 빛에 알몸을 바친 빨래들
부끄러움도 없이 카리브해 바람에
축축한 기억들이 춤춘다
칸나 꽃잎을 짜 칠한
파란 하늘을 달리는 빨강 자동차들
눈을 찌르는 원색의 의상들
핏빛 음악과 살사춤
그것은 억압과 유약함을 벗어던지고
오늘과 내일을 이어가는
쉼 없이 피 흘린 저항의 불꽃
허기진 입 크게 벌리고
멈추어 선 풍경들이
카메라 앵글로 쏟아져 들어온다
뒤틀리고 꺾이고 옹이 진
원시림 나무의 내부처럼
가장 중요한 곳을
비우고 채우면서 견뎌낸
바람도 잠든 말레꼰 해변
야자수 그늘에서
견고한 시간의 무게를 팔베개에 누인다
♧ 그늘의 미학
모네의 정원에 달이 푸르다
물상에 드리운 달그림자
뽀글뽀글 물방울이 밀어 올리는 속삭임
공중에 궁륭을 이루다 돌아와 앉는다
존재를 드러내는 모든 형체는 산 알이다
무드라다
인디오의 춤사위다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내는 둥근 윤곽
천 길 아래서 들리는 무한 천공의 소리
그늘은 수태의 모궁이다
수면 아래 알들의 수런거림
둥근 사리 한 방울 수련 잎에 올라앉는다
무엇이 되기도 전 사라져간 것들이 눈 뜨는 시간
어깨 위에 드리우는 달의 노래에
부푸는 수련 봉오리
그늘 벗어나
활짝 웃는 네 얼굴에 입 맞추는 한낮
♧ 나비장
나무의 결을 따라 나비잠을 깨운다
닫힌 공간 속에 더 많은 나비가 잠들어 있다
자주 열리지 않는 문
열쇠는 선반 위에 두지 않았다
접혀 있는 옷 사이사이 스민 기억의 파장
오랜 버팀이 쌓여 있는 곳
더 깊은 방 옻칠 속에 갇힌 보석의 신비
억압은 서투른 힘이다
쌍용이 달을 희롱하는 몽상의 밤
달빛이 겹문을 연다
바람이 습향을 거풍한다
사물과 사물의 말 없는 소통
열고 닫힘은 생동하게 하는 힘
내밀한 공간 안에 잠들어 있던
말들이 실눈을 뜨며 술렁거린다
벌레들도 구석의 작은 살롱을 열고 소란스럽다
소리를 읽으며 공간을 확장하는 나비
미루나무 끝으로 날아오른다
푸른 실루엣을 입고
♧ 알들의 소란
수면 아래 알들이 떠다닌다
아직 깨어나지 못한 알과
형태를 갖춘 알들이
서로를 껴안고 뒹군다
먹고 자고 여행하고 생각하고
쓰고 싸우고 화해하는
일상이 분화의 터전이다
막막하기만 한 미지의 영역도
한순간도 떠난 적 없는 매일매일이다
물이 대지의 구석구석을 흐르면서
사물을 일으키듯
알은 몸의 각 기관을 흘러 다니면서
하나의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새롭게 바뀐다
순간에 멈추어 있지 않게 하는
권력을 저항하게 하는
고정된 이름에서 도망치게 한다
끝없이 흐르고 끝없이 변화하여
선명한 모형이 되는
그리고 또다시 떠나는
♧ 소리의 질료
누가 숲을 고요하다 하는가
정령들의 눈동자가 아침을 핥는
물안개 피어오르는 숲에는
나무와 나무의 간격을 좁히는 바람
나비 날개짓에 춤추는 이파리들
꽃술의 달콤함을 빠는 꿀벌의 진저리
바위에 붙은 이끼 키득대는 웃음
유두같이 매달린 버찌들의 젖몸살
죽은 나무 등걸에 걸터앉은 잔나비걸상의 궁시렁
직박구리가 쪼아 떨어트린 잔가지의 신음
지층을 흔들며 솟아오른 동충하초의 함성
비척거리는 내 활자들 허공 더듬는 소리
5월의 숲
세로로 가로로 공기를 흔들며
흩어지는 소리, 소리들
♧ 탈脫
60조의 세포 1.3 킬로그램 미생물의 서식지
이들이 모여 만든 지구의 뾰두라지
손을 펴면 우주의 창이 열린다
포효하며 세상에 나온 아기호랑이
물결무늬 사막의 주름
바람을 일으키며 달리는 얼룩말
표류하다 중심으로 돌아오는 도돌이표
떠도는 입자들을 빨아들이는 블랙홀
모여서 지층을 이루고
흩어져서 되돌아가는 소용돌이
지층을 벗어나야 보이는 출구
일상에 버티고 있는 벽에 끝없이 균열을 내
너머를 향한 문을 연다
지층을 만들고 지층을 빠져나간 미립자들
새롭게 무엇이 되기 위해 융기하는가
*김혜천 시집 『첫 문장을 비문으로 적는다』(시산맥, 2022)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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