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김길웅 시집 '다시 살아나는 흔적은 아름답다'(2)

김창집 2022. 4. 25. 08:56

 

외연外延

   -멀꿀

 

넝쿨이 그림을 그린다

허공을 휙 끌어안는다

길을 내고 걷다 휘청하면

친친 제 몸으로 휘감아

한데 섞여버린다

골목을 빠져나와

고샅길에서 한숨 돌리고서

한길로 이어지는 멀고 먼

넝쿨이 얽힌 대장정

뒤돌아보면 아득한 시원始原

 

그리고 이제는

울울창창하다

그 사이 많이 불었다

 

 

 

소아과의 언어

   -작은아들에게

 

아이에겐 아프다는 언어가 없다

청진기가 음운을 짜 맞추고 나면

주사 한 방에 터지는 언어

소아과 의사는 울음의 언어를 만든다

아이들은 집에선 말 않는다

소아과는 아이들이 우는 곳

울게 하는 곳

의사는 웃고 우는 어린 것을

웃음으로 웃기는 소아과 의사는

언어의 연금술사

소아과의 언어는 수사修辭 아니다

영혼의 교감交感

웃음이 빚어내는.

 

 

 

우중 산책

 

빗속을 거닐더라도

가령 우산을 쓰지 않았을 때

빗속으로 걸어 들어가는데

먼 데서 달려와 모로 눕는 무적霧笛

소리에 깨어나 번쩍 눈 뜨는

그리움 위로

비는 더 내릴 기세이고

나는 희붐한 옛 기억 쪽으로

다가서다 등 돌렸다

다시 돌아앉는 서슬에도

아직 비는 내리고

멀리 소멸을 위해 겨자씨 만해진

날 선 시선의

끝을 끌어당기기 위해

나는 지금도 거닐고

비는 줄곧 내리고.

 

 

 

책 속의 봄

 

손깍지 끼고

책 속에 봄이 앉아 있다

화창한 책 속

몇 줄 읽다 행간을

한 걸음 내려서면

눈앞이 길이다

 

바람에 밀리며

밀며 길을 나서면

졸음 쫓는다고

벌레 한 마리 폴짝 뛴다

봄날 책 속엔

나만 있고

시간도 부재중.

 

 

 

갈맷빛 바다

 

노을은 그리움이 불타는 것

활활 타고 맞는 그 밤에도

잠을 이루지 못한다

하지만 밤을 물밀어오는

갈매 빛 바다

가장 순정할 수 있을 때

바다는 갈매 빛을 한다

끊임없이 앙금을 토해내는

파도가 바다를 어루만질 때

절정에서 진저리치며

그리움을 털어낼 때

갈매 빛이다.

 

 

 

숲의 학습효과

 

숲이란 사방에서 모여든

수많은 나무들 다른 종들의

동질화한

커다란 포장이다

솔이 없고 아카시아가 따로 없다

다양성의 단순화

오랜 세월 숲은 그렇게 변했고

동화同化를 학습해 온다

노역勞役 앞에선

숲을 비켜가는 바람

숲엔 바람이 머무른다

관통하다 깊이 숨는 물고기

숲의 천 년 침묵

숲의 학습효과.

 

 

        * 김길웅 시집 다시 살아나는 흔적은 아름답다(대한문학, 2009)에서

                                   * 사진 : 멀꿀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