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경의 거리를 걷고 싶다
에어컨을 켜고 잔 첫날밤이 지나고 비가 부슬거린다
태국과 캄보디아의 국경,
거기 국경에는 그 흔한 총 한 자루 보이지 않는다
녹슨 철조망 한 토막 쳐 있지 않았다
난민처럼 밀려오는 캄보디아 사람들
국경의 거리를 가득 채우고 있다.
날품을 팔러 하루의 막일 자리를 얻기 위해
생필품을 구하러 구걸을 하기 위해
손수레를 끌고 꼬막만 한 누이의 등에 업혀서
어느 잔인한 지뢰지대를 건넜을까
자전거를 개조해 페달을 손으로 돌리며 가는
두 발목이 잘린 사람들
흑백사진 같은 그들의 휑한 눈앞에 결코
배부른 디지털의 사진기를 들이댈 수 없었다
우리의 50년대가 저랬을 것이다
60년대가 70년대의 과거가 우리의 현재가
보이는 곳 보이지 않는 곳에서 혼재하며 있듯이
여기 또 머나먼 이국의 땅 국경의 거리
너와 나의 부끄러운 조국을 되새기게 한다
조국의 국경은 끝내 완강할 것인가
저렇게 건너가고 건너 올 수는 없는 것인가
남쪽 머나먼 나라 국경의 거리를 걷고 있다
그 보다 먼 내 나라 국경의 거리를 걷고 싶다
♧ 나른한 오후
꽃의 눈부심에 갇혀 자괴에 빠졌다
새들의 창공에 매여 악을 쓰기도 했다
이십이었을 때, 삼십이었을 때
꽃을 바라보다 내 얼굴을 만져보네
새들의 하늘을 올려보다 걸어온 발등을 바라보네
이제 그만 나른해져야겠네
♧ 푸른 종소리가 그립다
-권정생 선생
거스름돈, 주머니에 넣은 동전이 흔들릴 때면
이명처럼 어디에서 누가 종을 치는가
애기똥풀이 필 때면
흰씀바귀꽃 목 긴 꽃그늘이 바람에 흔들릴 때면
낮은 곳으로 마른 대지를 적시며
세상의 가장 낮은 곳으로 엎드려 흐르는 강물
강물을 따라 걷다가 당신이 거기에 있었음을
아니 바로 강물이었음을
이제야 비로소 알았습니다
당신 떠나시고 시절은 더욱 난장판입니다
어지러운 이 봄날 당신의 푸른 종소리가 그립습니다
세상의 종지기였던 이여
몽실언니는 만나보셨겠지요 그곳에선
옆구리에 구멍을 뚫어 매달던 고무관도 없이 훨훨 자유롭겠지요
마주 앉을 자리도 없던 손바닥만 한 쪽방
거기 나란히 앉아 말 없는 안부를 나누던 날을 기억합니다
수줍음 많은 소년 같은 미소를,
아니다라고 단호하게 내리치던 그 곧고 강직한 정신을,
먼 데서 온 벗을 마중하거나
혹은 해질 무렵 들풀 우거진 작은 마당을 서성였을
댓돌 위 보랏빛 고무신 한 켤레를
누옥 같은 내 삶의 선반에 얹어놓아 봅니다
살아 세상의 고통 받는 아이들에게 당신을 온통 아낌없이 나누시던
아름답고 깨끗한 가난을 떠올립니다
다시 태어난다면 건강한 스물다섯 청년의 몸으로
벌벌 떨지 않고 연애를 해보고 싶다는 연분홍빛 소원도 말입니다
꽃과 나무들의 초록으로 환한 오월
인디언들은 오월을 오래전에 죽은 사람이 생각나는 달이라 했다지요
오래오래 생각나겠지요
오래오래 당신의 손때 남겨놓은 것들 향기롭겠지요
오래오래 아주 오래 말입니다
♧ 파랑새와 명부전
그가 명부전에 이름을 올린 후 파랑새가 날아왔다
북극제비갈매기는 북극권에서도 가장 북쪽에 둥지를 틀고 살다가 해마다 겨울이면 지구 반대편인 남극에 가서 겨울을 난단다 일만팔천 킬로미터의 거리를 그러니까 시속 백 킬로미터로 간다면 백팔십 일을 계속해서 그 긴 여행을, 이백 킬로미터로 간다면 왜 그렇게 멀고 먼
머릿속에서 왜, 왜의 의문부호와
풀리지 않는 거리가 오가는 동안
장마 비 비 비
쏟아지는 굵은 장대비와 콸콸거리며 떨어지는
낙숫물과 양철지붕의 빗소리와 불어나는 개울 물소리와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 사이에서
아득한 것과 까마득한 것과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과
거기 그 사이에 꽃이 피고 파랑새가 날아오고
북극에서 남극까지의 시속과 꿰어지지 않는 거리를 헤매는 동안
내 곁에도 명부전은 가까워졌다
거기 이름들은 더께더께 쌓여가고
♧ 봄 강
겨울 철새들의 기억 기억 기억해요
다시 돌아오마고 기역 자를 쓰며 떠나간다
강물이 글썽이며 반짝반짝 손을 흔든다
그 강가 버들강아지들 떼거지로 깨어나서
꼬리 치며 이별하는 삼월 봄 강 풍경
♧ 비와 나와 인도양
여름날 소나기가 내리면 세살터울의 동생과 훌렁훌렁
옷을 내던지고 마당을 쏘아 다녔다
비를 맞는다 비 내리는 바다
못 가리라
머리칼에 서리가 내려서는 돌아갈 수 없으리라
비, 저 작은 물방울들
순간을 내던져 바다의 몸을 이룬다
한때는 어느 푸른 강물이었을
들녘의 키우던 기름진 물줄기었을
사막의 갈증 앞에 놓인 감로의 물이었을
우물이었을 흙탕물이었을 실개천이었을
저 작은 빗방울 저 거대한 바다
허공으로부터 내려와 몸을 바꿔 다시 오르는
범피중류 둥덩실 떠나간다 망망한 창해며 탕탕한 물결이라*
저 푸르름을 무어라 불러야 하나
인도양의 바다가 푸른 비단을 펼친다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모호한 여기 먼 바다의 배위에서
문득 심청의 인당수가 스쳐갔다
능라의 모래가 우는 사막을 떠올린다
욕망의 덧없음을 깨닫는다
얼마나 부질없는가 일장춘몽의 봄밤
세상의 빛들이 변하는 연금술의 시간
일몰의 바다 지는 해가 황금빛 바다의 길을 뱃머리에 펼친다
해가 진다 달이 뜬다
해의 길이 거두어지고
붉은 달이 길을 닦는다
끝없는 윤회의 저 범피중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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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소리 심청가중 심청이 인당수에 빠져 떠내려갈 때 주위의 풍경을 읊는 대목.
* 박남준 시집 『그 아저씨네 간이휴게실 아래』(실천문학사, 2010)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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