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산포 유채꽃
언제 씨 뿌려도 사시사철
그리우면 피어나리니
한겨울 아랑곳 말고 너희는 오라
터진목 모래밭 정월만 돌아오면
흥건하던 핏자국마다 실뿌리로 엉킨 채
어우러져 앞 다투며 피어나
바람 한 점 없어도 흔들리는 우리를
관광객들 무심히 사진 찍고 가더라도
나 보고프면 상관 말고 아무 때나 오너라
와서 부르면 칼바람 추위 속에도
꽃대 피워 올리는 피 어린 절규를
아직도 샛노랗게 떨고 있는 그 속내를
다 잊기 전 낱낱이 보여주리라
♧ 성산포 봄소식
이 봄을 참을 만하면 참지
그러나 검은 저 돌담과
홀로 취할 수 없는
바다의 시퍼런 속살은
개나리 유채 산철쭉
망울 터뜨린 뒤 한참
잊을 만하면 꽃잎 드날려
오후 한나절을 우수수
바다와 함께
잠드는 청보리밭
사람이여, 깨어나는 영혼과 팔짱 끼고
새벽녘 다시 바다로 나가는 사람이여
스치듯 스치듯 고단함도 없이
깊고 먼 바다를 나비 날아가다
뱃전에 앉으면
그대의 물결 조금에 이르러
다시 사리로 흘러가며
그 여린 날개에 실어
바다 건너 봄을 몰고 오는구나
노란, 붉은, 흐드러진
봄의 흐느낌 속에
홀로 떠나고 싶은 자 영원히 떠나는 곳
돌아오고 싶은 자 영영 다시 돌아오는 곳
성산포
♧ 성산포 행
한 겨울 파도가 새끼청산* 마음 놓고 때려
우르릉 우르릉 청산靑山* 삼킬 듯 울부짖을 때
바다에 쫓긴 사람들 잠 못 이루고
긴긴 밤 술추렴 꽃놀이로 하얗게 지새울 때
어느덧 하늬바람은 막차 끊긴 텅 빈 거리를
골목골목 짓쳐 내달리며 마을을 끌어안는 것이다
성산포는 바다가 취해 드러눕는
나약한 곳 아니다 태평양을 건너온 파도
마지막으로 크게 울고 잠드는 곳이다
철근 휘어잡아 우그러뜨리는 곳이다
동중국해 주름잡으며 파도에 살고 죽던 친구들
바다 빼앗기고 지금은 무얼 하나
성산포는 팔뚝에 문신 새긴 격렬한 사내들
술도 됫술로 마시는 고장이다
순정 바쳐 사랑하는 바다에 나가
한 달씩 살다 문득 과자봉지 들고 귀가하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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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끼청산 : 성산일출봉 뒤에 송곳니처럼 솟은 바위.
*청산 : 성산일출봉의 옛 이름.
♧ 다시 성산포 행
황량한 검은 바다가 부르고 있었네
포효하는 흰 파도 소리치고 있었네
언덕 위 자꾸만 쓰러지는 풀잎들이
바람결에 끝없이 손짓하는 겨울날
억겁세월에도 가라앉지 않을 청산이
구름에 가린 얼굴 드러내며
아들아 이제 그만 떠돌라,
어서 달려와 안기라,
나를 타이르고 있었네
바다의 정령 마을을 덮을 때
떠나온 고향을
그러나 아직은 돌아가고 싶지 않네
바다에 살다가 바다에 숨 놓은
친구들이 바람 섞인 목소리가
사방팔방에서 그만 돌아오라고 외치고 있지만
*김석교 시집 『봄날 아침부터 가을 오후까지』(심지, 2009)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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