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5년 겨울 – 나기철
갓 보내온
등단 30년 만에 낸 권명옥 시집 『남향』과
또 등단 30년 만에 낸 서정춘 시집 『죽편』과
김종삼 시집 『평화롭게』와
박용래 시선집 『먼 바다』 옆에
놓인
내 시집 세 권
♧ 4․3 다랑쉬굴 사건을 A4 용지 1매로 요약하시오 – 서안나
11명이었다
아홉 살 아이부터 51세 여성까지
모두 민간인이었다
군경민 합동 토벌대들이
수류탄을 던지고 굴 입구를 막아 불을 놓았다
불을 놓던 9연대의 손에는
짐승의 피 맛이 났고
학살의 문양이 새겨졌다
굴속에는 코와 귀로 피를 흘린
죽음의 공포가 연기로 가득했다
사십삼 년이 지난 후 유해를 발굴했다
학살의 유래가 따라 나왔다
공무원들이 서둘러 유해를 화장해 바다에 뿌렸으며
다랑쉬굴 입구를 큰 산돌과 콘크리트로 봉했다
11구의 죽음은 공문서로 짧게 요약되었고
그들은 죽어서도 계속 죽었다
아름다운 제주에는
아름답지 못한 학살이 오름보다 더 많다
오름에 해변에
살아남은 사람의 심장 속에
백비처럼 누워있던 사람들
돌의 탯줄을 달고
죽지 못한 얼굴을 주먹에 움켜쥐고
청년의 얼굴로
아름다운 제주로 걸어 나오고 있다
♧ 바둑 2 – 양동림
1. 칫수
공정하지 못하다는 것은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세상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중요한 곳은 모두 놈이 차지하고 있었다.
새까만 암흑천지에 하얀돌 하나 툭
던져 놓았다
밤하늘 수많은 별들 사이에
나는 희미하게 반짝이는 조그만 별이었다
무사히 살아갈 수 있을까?
무의식중에 신을 찾는다.
비옵니다! 비옵니다
다음 생에는 내가 저놈이 되게 해주세요!
2. 미생
집 없이 떠도는 삶을 살아본 사람은 안다.
얼마나 비참한지.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면
저렇게 많은 집중에 내 지이 없다는 것이 더 슬프다.
어렵사리 담을 쌓고 집을 지으면
무허가라고
도로가 없다고
사정없이 허물어 버린다
남의 집에 빌붙어 겨우 지내는 삶
언제 죽을지 모르는 하루살이 같다
죽도록 일을 해도 이 땅에 내 집을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일지 모르는 생각이 엄습해온다
비옵니다! 비옵니다
집 많은 놈에게서 빈약한 한구석 툭
떼어 나에게도 나눠 주기를 비옵니다
같이 사는 세상이 되기를 비옵니다
♧ 어둑시니* - 오광석
소개령이 끝나고 섬에 생기가 돌아오는 봄날 고림동 돌성에 어둠이 내리자 멀리서 들리는 소리 나뭇가지가 꺾이며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 경비망루에서 바라보는 열다섯 소년의 눈이 커지고 몸이 오그라드는데 어둠의 근본이 마을을 향해 다가오네 마을 사람들을 깨워야 하는데 부스럭부스럭 들려오는 녹다만 눈을 밟는 소리 소년의 손에 든 죽창이 다닥다닥 떨리는 소리 다가오는 어둑시니는 바라보면 볼수록 거대해져 가는데 소년이 마을을 지키기 위해 배에 힘을 주고 지르는 고함소리 마을 사람들이 놀라 집에서 통시에서 대기소에서 뛰쳐나오는 소리 아래로부터 솟아오르는 용기에 성 밑을 바라보는데 내려다보면 볼수록 어둑시니는 작아져 동글동글하게 뭉쳐지네 다가올수록 작은 형상이 되어 넝마 같은 갈중이를 걸친 아이가 올려다보네 배가 고파서 산을 내려왔다는 아이가 소년을 바라보네 어둑시니를 이긴 소년의 손에 힘이 빠지고 죽창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 산을 내려온 아이가 지쳐 흙밭에 풀썩 주저 앉는 소리 소년은 망루에서 내려와 아이에게 달려가 업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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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담 요괴. 요정의 일종.
♧ 떠나고 남은 것들 – 이종형
서른 해는 족히 묵었을 옷장을 풀어헤치니
유행지난 옷가지 소에 숨었던
젊은 날의 몸들이 와르르 쏟아져 나온다
희망과 절망이 자주 교차했던 시절
서두르지 않으면 놓칠 것 같은 꿈들은 왜 그리 많았는지
불안에 떨던 날들의 증거물처럼
눈앞에 펼쳐진 측은한 허물 앞에서
후회와 반성이 반반
그러면서
낡아버린 몸을 위로해본다
이파리 다 떨궈 가벼이 몸 비운 겨울나무처럼
이쯤이면 속이고 감출 것도 없으니
버리다 남길 옷가지 몇 벌이면
돌아오는 봄을 걷기엔 충분할 것 같은데
차곡차곡 접혀 종이박스에 담기는
한때 젊었던 몸이
부디 쓸모없는 것만은 아니었기를
너를 떠나보내고 나면 부디
남아있는 몸은 더 가벼워지기를
♧ 사회적 거리두기 – 장이지
그전에도 외로웠어요 까만 벽뿐이었죠 판자때기 벽에는 먼 옛날의 신문지가 붙어있고 기사를 읽을 생각도 없이 외로웠어요 바닥으로 흘러내린 사회가 문신처럼 귀와 잎 사이에 나타났어요 온종일 아무하고도 말하지 않은 채 사회적 거리두기를 참 잘했어요 어디에선가 탄저균이 담긴 편지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변종 바이러스에 감염된 환자가 쓴 엽서가 배달된다는 풍문이 들려왔어요 감염된 자가 펜에 침을 발라 꾹꾹 눌러쓴 엽서가 말이에요 그러나 저에겐 주소가 없어요 당분간은 채권 추심인도 집배원도 저를 찾지 못할 걸요 여기는 벽뿐이에요 저는 거리두기의 챔피언, 사회적 거리두기가 있기 훨씬 전부터 사회와 안 친했어요 자고 일어나면 입과 귀 사이에는 사회가 낙인처럼 찍혀 있었지요 그전에도 외로웠어요 태어나자마자 까만 벽뿐이고 옛날의 신문에는 우리 같은 사람들의 눈물이 까맣게 전시되어 있었어요
*계간 『제주작가』 2022년 봄호(통권 76호)에서
*사진 : 가파도 청보리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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