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막을 깁는 조각보
사막을 깁는다
보라 옆에 노랑 노랑 옆에 빨강 빨강 옆에 초록
공간이 숨 쉰다
색을 어디에 배치하였는가에 따라
맥문동 꽃밭이 되고
불꽃이 되고
바다 초원이 된다
새로운 시야는 공간을 확장하는 힘
곤의 땅에서는 하늘이 파랗고
붕새의 하늘에선 땅이 파랗다
정보들이 흘러넘쳐 사막화된 도시
낯선 타자들이 웅성거린다
공간은 물질과 비물질이 횡단하는 패치워크
한 조각에서 다음 조각을 잇는 선을 따라
모래알갱이들이 사막을 깁는다
♧ 허기
볼쇼이아이스쇼를 보다
오페라 유령이 펼치는
화려한 춤 속에서 길을 잃었다
길을 모두 삼켜버린 어둠 속에서
검정비닐을 뒤지다 몫에 걸린 생선가시
벌겋게 충혈된 길고양이 눈
냉동고 문을 열자
빤히 올려다보는 고등어의 퀭한 눈
밀어 넣을수록 유폐되는 허기
채울수록 가릉 대는 식욕
냉동된 우울은 암 덩이가 뒈
혼자 노는 적막은 웃음이 없어
딱따구리 노는 숲에서 함께 울어야 해
비 갠 뒤 피어난 광대버섯
중천에 뜬 태양을 향한 불끈 쥔 헛손질
먹어도 먹어도 채워지지 않는
우물보다 깊은 목마름
♧ 허들
바닥을 다지던 시간들이
여름 강물처럼 흐르고
중력에 짓눌릴 때마다
속도를 내는 몸
끝없는 물음을 품고 달리는 정신의 높이
겹겹이 도사린 장애물을 뛰어넘는다
도약은 더 이상 뛸 수 없을 때
올려다보며 발돋음한다
살아있는 속도로 선반을 뛰어 넘어
부드럽게 착지하는 고양이 초원에 맺힌 이슬
♧ 침묵의 사계
시간 속에 스며 있던 침묵이 하루하루 몸을 일으킨다
가장 먼저 광장에 도착한 아이들이 공놀이를 한다
공이 담벼락에 맞아 튕겨 나오듯 아이들의 말소리가 마치 봄의 사물에게 길을 가르쳐 주듯 튕겨 나온다
그렇게 돌연 봄이 오고
침묵의 체에서 떨어져 나온 하얀 꽃들
시간의 갈라진 틈으로 돋아나오는 어린 이파리들
한 그루 나무에서 또 한 그루 나무에게로 옮겨가듯 연둣빛 들판
숲속의 고요가 여름 한낮의 터널을 빠져나온다
거칠게 여름을 부려 놓을 적의는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았으나 여름은 소란스럽게 찾아왔다 울울한 숲 사이를 뛰노는 정령들, 고라니가 등불처럼 까만 눈동자를 밝히는 한낮의 고요, 물러날 것 같지 않은 푸른 기세도
침묵이 한 번 숨을 고르고 가을이 오면 먼 길 떠나기 전 전깃줄에 앉은 철새들처럼 사과나무가지에 매달려 익어가는 사과들, 떨어지는 사과를 받으려고 내미는 손 사이에 흐르는 적막, 사물의 색이 점차 짙어지고 침묵은 이미 추수의 감사로 사과주를 마시는 사람들의 노래 속에서 공명한다
눈이 내린다 모든 사물과 공간은 순백에게 점령당하고 시간 안에서 일어났던 일들도 인간의 말도 고요 속에 갇힌다 침묵은 이정표와도 같이 망각과 용서만이 남은 하얀 들판 생각이 정지된 무음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한다
♧ 묵화墨畵
적막한 하늘은 지구의 서사를 끌어안고 침묵 중이다
침묵은 더 이상 침묵 할 수 없을 때
노골적으로 몸통을 드러낸다
지구의 구석구석을 살피던 태양이
산허리를 돌며 깔아 놓은 데크 위에
기형의 명암을 풀어내는 정오
지구는 산에서 고름이 줄줄 흐르고, 바이러스가 얼굴을 바꿔가며 활개를 치고 있구나, 지구인들은 삶과 죽음의 경계가 맞닿아 불안에 떨고 있구나, 숲을 이루어야할 나무의 뼈들이 병들어 비틀리고 말라가며 재앙의 날이 오기도 전 고열로 몸살을 앓고 있구나
쪽빛과 초록은 사라지고
검고 숭숭 구멍난 목덜미만 앙상한 나무의 초상
뒤틀리고 벌레 먹은 그늘의 의미를 받아 적을 수 있다면
데칼코마니로 저 눈물을 찍어낼 수 있다면
내 안에 흐르는
몇 광년의 청정한 거리로 걸어갈 수 있어야 한다
바람이 나무를 흔들어
새로운 무늬를 만들어 내는 접속의 시간
따가운 파열음이 고요를 흔들고
뿌리는 한 뼘 더 어둠 속으로 깊어진다
*김혜천 시집 『첫 문장을 비문으로 적는다』(시산맥, 2022)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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