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김길웅 시집 '다시 살아나는 흔적은 아름답다'(3)

김창집 2022. 5. 2. 01:06

 

구절초

 

  떼거리로 낙목落木의 들판을 질러가는 바람소리에 귀 틀어막고 묵직이 내려앉은 한천寒天 귀퉁이 파닥이는 빈 가지에 눈 감았습니다 겨울의 문턱에 나 앉아 한 겹 남루로 떨고 있지만 머릿속엔 쏟아져 내리던 별의 기억뿐입니다 언덕배기에서 몇 년을 두고 바라보는 별은 빛이었습니다 빛은 몸 안으로 스며 언 살을 온기로 친친 감아주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화려한 문명의 의상이 아닌데도 하늘에서 지상에 내린, 찬란하지는 않지만 유년의 마당에 놀던 가장 따스한 노란 병아리 빛, 섬뜩한 빛의 서슬에 눈이 띄었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내가 별이 돼 있으니까요 춥지 않습니다

 

 

 

낙화를 위한 변명

 

가장 순정한 것이라

말할 때, 순간

동백은 진다

꽃이 지는 아름다움이여

아름다움이란 떠나왔다

다시 떠나는 것

떠날 때 지닐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어느 날 언어도 버린다

시도 진다

꽃처럼 떠나기 위해 버린다

져야 아름다울 수 있으므로

지는 것일 뿐.

 

 

 

그 큰 나무 아래 서거든

    -족보

 

울울창창하다

서너 아름나무

그 큰 나무 아래 서거든 우러르라

가지들 하늘 가득 메웠다

미풍에도 반짝이는 잎들

군데군데 눈부신 꽃과 황금빛 열매

머리 위로 햇살 내려앉고

먼 옛날 뿌리에서 퍼 올린 물

그 물 흐르는 소리

줄기를 타고 가지로

가지에서 잎으로

, 콸콸 피 흐르는 소리.

 

 

 

방어회

 

한쪽 귀가 헐려도 아픈데

넌 지금 온통 몸을 부쉈구나

통통하던 몸매 발라지더니

물살 가르던 소리도 멎었다

이제 네 몸은 갑작스러운

체념으로 수없이 도막나고

육탈 뒤 하얀 뼈로 반듯이

화석으로 눕는구나

잠시 깔고 앉은 푸른 배춧잎

위로 파드득파드득

한겨울 싸락눈 구르는 소리

입 안 가득히 침이 고이더니

그 사이 소주 몇 순배 돌고

찰랑찰랑 바닷물 소리

 

 

 

새의 숲

 

지금까지 있는 방식대로 있어서는 되는 것이 아니다

춤도 못 추고 음역에 못 미쳐도 노래는 하라 이르건만

석회질로 굳은 빳빳한 뼛속에 헛바람만 들락거리는 겨울 숲

일생을 외고집으로 살아온 시간은 아직도 푸르다

산마루를 지나는 무장 해제된 자유가 구름의 등을 밀어

이순의 들판에 바람으로 와 묻어둔 기억의 속살을 발라낸다

새 한 마리 숲에 앉아 늙은 나무의 휜 허리를 쪼아대다

맞바람 안고 푸드득거리는 소리에 언 숲의 눈을 뜬다

새 소리 듣는다고 새 한 마리 끼고 살아 후회 않는 숲.

 

 

 

언 강

 

이파리를 떨구고 나서

조금은 침잠하려는 것

얼어붙은 것은 잠시 머물음

영속하는 시간 속 찰나를

고스란히 거둬들이는

겨울 강의 침착한 은둔은

아직 봄을 그리고 있지 않음

이제 한 군데 머물고 싶음이여!

지나온 길 위로 눈이 쌓이고

살아온 일들 지워질 때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떠남, 떠나며 머물음

언 강에 얼어붙은 배 한 척

나무처럼 서 있는 저 머물음.

 

 

                          * 김길웅 시집 다시 살아나는 흔적은 아름답다(대한문학, 2009)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