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레 풍경
마당을 나오면
곧바로 올레다
이른 계절 돌아드는 바람
누가 오지 않아도
하루 종일 참세 떼 지저귀는 길
구름 몇 점
나뭇가지에 걸려 펄럭이다 말고
허공 펄펄 날아가는 길
서둘러 간다고
빨리 갈 수 있는 길도 아닌
바닷가 섬 하나
손짓하는 길.
♧ 올레 마을
올레가 길면
마당도 깊어라
울담 하나 사이 두고
정(情) 풀어 나누고
인심(人心)이야 잘 익은 된장 맛이지
구불구불 이어진 동네길
오멍 가멍 마주치멍
“어디 감수과앙?”
“혼져 옵서게”
“고찌 가게마씀”
손 나래치는 올레길.
♧ 칠십 리 올레(1)
바다를 등지고
바람 따라 내려간다
꼬리말아 감추고
멀리 달아나는
푸른 물살들
소금 빛 햇살에
발가락이 시리다
칠십 리 길 어디냐고
누가 묻걸랑
바닷길 메우는 바람소리
들어보라 한다.
♧ 칠십 리 올레(2)
산(山)이 내려온다
청심(淸心)의 하늘 비워두고
슬금슬금 내려와
길을 막아선다
돌아가는 길
따라오는 산그늘
휘파람새 멀리 날아간다
칠십 리 올레길은
산을 넘고 들을 건넌다
가을처럼 흔들며.
♧ 새벽길 산보
새벽처럼 일어나
올레길을 간다
눈곱 낀 풀잎들이
살 비비며 일어난다
고무신에 하얗게
이슬 고이고
밤새 떨어진 별빛 같은
풀씨들
발끝에 채인다
아직은 거너 숲
새벽 단잠 베고
어둠은 길게 누워 있는데.
♧ 오름길을 오르며
오름(岳) 반쪽 등에 지고
길을 오른다
쉬엄쉬엄 올라도
숨이 턱에 닿는데
길섶 잔솔밭 그늘은
바람 잔뜩 품고 있다
친구야 잠시 쉬어 가자꾸나
마음 한 자락
풀숲에 눕히고
저 멀리 굽이도는 길
석양처럼 넘어가는
계절을 본다.
♧ 들녘 길을 가며
억새들이 모여
몸에 묻은 햇살을 털어내고 있다
들녘 길 막아선 채로
빈 몸에 된 억새풀들은
바람으로 흔든다
가을은 가다말고
허공으로 올랐다
바람에 불리는 햇살
풀씨들이 날린다
저 빛나는 가벼운 존재
꿈의 씨앗들
들녘 길을 간다
가다 말고 가만히
귀 기울면
몰래 따라와 옷깃에 묻는
억새풀씨 소리.
*김용길 시집 『빛과 바람의 올레』(서울문화사, 2010)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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