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김석교 시집 '봄날 아침부터 가을 오후까지'(5)

김창집 2022. 5. 3. 00:09

 

파도

 

그가 달려오는 이유는

육지를 할퀴기 위해서가 아니다

해안선을 무너뜨리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는 자신으로 자신을 몰아세우며

캄캄하게 새하얗게

달과 바람과 조류도 거부하고

인간을 향해 마냥 달려온다

   

그가 달려와 부서지는 이유는

영토를 허물기 위해

우리를 알 수 없는 해저로

끌고 가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가 달려와 부서지는 이유는

와락

우리를 안고 싶은 것이다

온몸으로 사랑하고 싶은 것이다

 

 

 

푸르른 달빛

 

내 어느 날 쓸쓸히 수심에 잠겨

머리칼 밥 이슬에 찰찰 헹굴 때

날새들 깃 풀어 잠들어 있었네

옷자락 펄럭이며 찬빛 뿌리며

서녘으로 걸어오는 도저한 그댈

차마 마주할 수가 없었네

이 밤 발 헛디뎌 천길만길

눈부시게 다가오는 새 세상이여

무한천공에 영혼들의 목소리

떼새 깃 말리는 새벽녘까지

푸른 얼굴의 그대가 따라오고 있었네

 

 

 

마음의 소리를 듣는 법

 

그토록 내 마음이 알고 싶다면

동녘을 향해 눈 감고

네 마음을 열어봐

그럼 가벼운 서슬에도 놀라

새소리로 반짝거리는

내 모습 알게 될 거야

뼈에 사무치는 그리움

애간장 끊기는 슬픔도

모두 나의 자취였음을

 

가끔은, 아주 가끔은 영영

눈 감고 싶은 아침이 있지

그때 청명히 귀 열고 들으면

저 잎새의 흔들림도

새털구름 하얀 하늘도

네 마음에 내 마음을

가만히 포개었던 흔적임을

이내 알게 될 거야

 

 

 

햇봄

 

돋아 오르는 새순을 보았네

연초록 젖은 몽우리

솜털 잔잔히 맺히는

딸 하나 키웠으면 좋겠네

그 이름 담이

귓불을 핥는 바람처럼

명주바다에 어리는 달그림자처럼

딸 하나 있으면 좋겠네

언덕에 보름달 떠오르듯

초롱초롱

둥그런 딸 하나 있으면 좋겠네

아비 사랑 사내 사랑 품고

세상 싹 틔울

꽃봉오리 젖가슴 하나 키우고 싶네

 

 

 

연애

 

샤워기를 틀어 물 온도 맞추듯

나를 그대의 온도에 맞추고 싶다

찬물 한 방울에도 소스라치는 세포처럼

가을의 원형질이 눈 뜨는 저녁

북쪽으로부터 발갛게 숲이 물들다

 

 

 

내 안의 탄광

 

심야 총알택시

한없이 파고 들어가던

그 어둠 속으로

나를 내던져

매몰돼 버릴 걸

석탄인石炭人으로 녹아버릴 걸

 

수십만 년 후

가슴 새카맣게 탄 채

원유이거나 원탄이거나 그 무엇

다시 캐내준다면

설익은 그대

단숨에 달궈버릴 텐데

 

 

                          * 김석교 시집 봄날 아침부터 가을 오후까지(심지, 2009)에서

               * 사진 : 5월의 들꽃 - 차례로 뱀딸기, 낚시제비꽃, 갯무(교배종), 윤판나물아재비, 둥글레, 

                                               은대난초, 할미꽃(씨방과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