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물을 따라 흐르네
나 내딛는 한 걸음이 이 땅의 강을 살리는 일이라면
그 강에 찾아오는 새 떼들의 노래하는 날갯짓
끊이지 않게 하는 일이라면
강을 따라 흐르는 걸음 어찌 함께하지 않으리
그리하여 내딛는 한 걸음이
강을 거슬러 오르는 은빛 비늘의 물고기 떼들
물길의 나침반 잃어버리지 않게 하는 일이라면
송사리 떼 송알송알 오르내리게 하는 길이라면
그 길에 어깨동무하며 앞선 발걸음 어이 뒤따르지 않을까
강물을 따라 흐르네
흐르다 때로 가던 걸음 멈추며
세상에 어떤 것들이 참으로 있어 눈물 나도록 아름다울까
걸어온 풍경을 떠올렸네
깊고 낮은 곳으로 흐르며 아낌없이 채워주는 강물을 생각했네
그 강가에서 눈을 뜨고 밥을 지어 나누며
고단하였으나 오지 않는 잠을 청하기도 했네
눈발이 날리기도 했네
눈길에 첫발자국을 새기며
뒤따를 사람의 발목이 젖지 않을 걸음을
앞서 걷는 이의 고맙고 따뜻한 수고로움을 생각했네
걸음마다 발자국들 이어졌네
멀리 그리고 가까이 반가운 손 흔들며 달려오는 등불들, 환한 행렬들
마른 대지를 적시며 흐를 당신 어, 어머니,
푸른 젖줄의 강물을 생각하네
강물이 강물로 살아 흐르는 생명의 강을 생각하네
뚜벅뚜벅 나 내딛는 한 걸음의 발자국이
죽음으로 가는 탐욕을 남김없이 지우며 거두어내는 일이라면
그 몹쓸 삽날을 막는 일이라면
강물을 따라 흐르네
지금 강물을 따라 걷는다는 것은
봄바람에 기지개를 켜며 깨어나서 고운 솜털 보송거리는
강가의 버들강아지야 널 지켜주겠다고
새끼손가락을 꼭 걸었기 때문이네
♧ 생명의 강이어야 한다
이 야만은 어디에서 왔나
이제 손짓하는 강 언덕에 서서 바람의 춤을 추던
억새며 갈대밭들도 흔적도 없어질 것이다
하늘거리며 푸른 숨을 쉬던 강물 속 물풀들은 숨이 막혀 사라지고
금모래, 은모래는 옛날의 기억으로만 쓸쓸하게 남을 것이다
재두루미와 큰기러기와 하늘을 비상하는 가창오리, 새들, 새 떼들은
어디 그 어디로 떠날 것인가
모래무지와 쉬리와 흰수마자와
저기 맑은 조약돌과 모래톱에 산란의 몸 부풀던
물고기들에게 어떤 희망이라는 내일이 찾아올까
주검이 되어 떠다닐 것이다
어쩌자는 것이냐
누가 대체 이토록 잔인한 죽음을 강요하는 것이냐
산허리를 잘라 철조망을 치고
이쪽과 저쪽, 앞산과 옆산을 뒷산과 그 앞강을
생명의 이동 통로를 막아버린 거미줄 같은 도로망과
죽음의 갯벌 새만금으로도 정녕 모자란단 말이냐
뉘우칠 줄 모르는 것이냐
사대강을 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한다는 말이냐
모든 경제가 파탄될 것이라는 말이냐
산을 뚫고 들판을 자르며 강바닥을 파헤쳐
이 나라를 온통 재앙의 아수라장으로 만들어가는 것이
창조적인 일자리를 창출한다는 것이냐
갈대숲과 모래사장이 있는 강 길을 따라 걸었다
그 풍경으로 인해 즐거웠으나 미안해, 미안해요 마음 편치 않았다
걸음걸음마다 새들이 인기척에 놀라 날아올랐기 때문이다
먹이를 먹거나 햇살에 몸을 말리며 단잠 꾸벅이는
새들의 안방을 방해했다 여겼기 때문이다
갈대숲과 모래사장을 없애고
콘크리트 성벽으로 높이 쌓아올려 분단한 강 길을 따라 걷는다
풍경은 삭막했으나 미안한 마음 잃지 않았다
날아오를 새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강가로는 새들이 찾아오지도 깃들어 살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안 된다 이렇게는 안 된다
너희가 무슨 오만한 권리가 있어 강물을 사리사욕으로 바꾼다는 말이냐
사대강은 악몽이어야 한다
잠 깨고 나면 다시 새들이 날고
알록달록 조약돌을 간질이는 맑은 물결이 찰랑거리며
은빛 모래밭과 갈대들이 너울거리는
평화와 고요한 아침이 오는
한바탕 악몽이어야 한다
수많은 수중보와 갑문으로 막혀 가두어진 채 썩어가는 운하가 아니라
작은 물고기들이 반짝이는 자맥질을 하며 흐르는
숨 쉬는 강이어야 한다
생명의 강이어야 한다
탐욕과 무지몽매와 기만으로 뒤덮여 죽어가는 강이 아니라
살아 함께 춤추는 푸른 강이어야 한다
생명의 강이어야 한다
♧ 운하이후
나도 흐르는 강물이고 싶다
반짝이는 모래사장과 때로 여울로 굽이치며
노래하는 강물이고 싶다
새들 날아오르고 내 몸의 실핏줄마다 거슬러 오르는
물고기 떼들의 힘찬 지느러미 소리 귀 기울이는 강물이고 싶다
강물이고 싶다 농부들의 논과 밭에 젖줄을 물리며
푸른 생명들 키워내는 어미의 강물이고 싶다
한때 나도 강이었다
이렇게 가두어진 채 기름띠 둥둥 떠다니며
코가 킁킁 썩어가는 악취의 물이 아니었다
죽음의 강이라는 오명의 대명사를 뒤집어쓰며
버려진 강이 아니었다
발길이 없는 손님을 부르며
목이 쉰 채 뽕짝 거리던 호객행위마저 끊긴 눈물의 부두가 아니었다
애물단지 관광 유람선 싸게 팝니다
고소영, 강부자 얼시구나 몰려들어 땅 떼기 하던
운하 부동산 헐값에 새 놓습니다
빛바랜 현수막들 을씨년스러운 풍경을
내가 언제 생각이나 했던가 꿈이나마 꾸었던가
아니었다 나는 살고 싶다 살아 흐르고 싶다
이제 나는 범람할 것이다
무섭고 두려운 홍수로 넘칠 것이다
막힌 갑문을 부술 것이다 굴을 뚫은 산을 허물어 산사태로 덮칠 것이다
모든, 그 모든 나를 막는 콘크리트 구조물들을,
이명박 표 운하를 해일처럼 잔재도 없이 파괴할 것이다
물푸레나무 푸른 물로 흐를 것이다
그리하여 내 곁에서 빼앗아간 아이들의 웃음소리 다시 찾아와
물장구치며 퐁퐁퐁 물수제비뜨는 푸른 강물로 흐를 것이다
유년의 색동 종이배를 접어 소원을 띄우는 꿈꾸는 강이 될 것이다
먼 바다로 흐르는 생명의 강으로 살아날 것이다
*박남준 시집 『그 아저씨네 간이 휴게실 아래』
'문학의 향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충성 시집 '빈 길'의 시(4) (0) | 2022.05.06 |
---|---|
계간 '제주작가' 2022년 봄호의 시조 (0) | 2022.05.05 |
김석교 시집 '봄날 아침부터 가을 오후까지'(5) (0) | 2022.05.03 |
김길웅 시집 '다시 살아나는 흔적은 아름답다'(3) (0) | 2022.05.02 |
김용길 시집 '빛과 바람의 올레'의 시(1) (0) | 2022.05.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