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지적 시점으로도 나를 찾지 못하는 – 김연미
나를 끝까지 밀어붙이고 벼랑이 되어 돌아온 날
무너져 내리고 싶다 빵처럼 부풀던 허공
세 번쯤 부정해 볼까 내가 소멸할지 몰라
목에 쌓인 먼지처럼 까끌거리는 별을 두고
그 너머 배경이 된 어둠이 되고 싶어
열두 살 눈동자 속에 숨어사는 까만 빛
전지적 시점으로도 나를 찾을 순 없을 거야
무중력 공간 속으로 유영하는 생각들이
이제 막 추락의 지점을 넘어가고 있었다
♧ 남바람꽃 - 김영란
안부를 묻는 것도 불안불안 했었지
해안선 5킬로 이내로 하산 하란 그 명령 바들바들 떨렸지 거처할 곳 없었지 세 차례 개명으로 난세를 타고 넘었지 바람의 땅에선 바람처럼 살아야 해 한라산바람 남방바람 아냐 그냥 남바람이라 할 거야
사월의 중산간 들녘
소곤소곤 바람 분다
♧ 진아영 – 김정숙
단지 집 앞에서
총 한 번 맞았을 뿐?
단지 오인해서
턱이 날아갔을 뿐?
소설도 영화도 아니 그림도 말도 아니
눈물 아니
고통 아니
삶도 아니
사랑도 아니
상상할 수 없는 일엔
상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살아서
증거가 될 뿐
나, 진아영이었을 뿐
♧ 철원의 별 - 김진숙
아마 저 별은
희디흰 뼛조각일 거야
서로의 심장을 향해
겨누던 총구일 거야
밤이면
몰래 내려와
지뢰 찾던
눈일 거야
♧ 2월의 피라칸사스 – 오영호
집콕만 하지 말고 밖으로 나오라는
지인의 한마디에 벙거지 눌러 쓰고
가는 길 칼바람에도 맞짱뜨는 너 만나
눈빛을 마주치자 불꽃이 일렁거려
몸이 따뜻해지고 귀가 밝아지더니
매화향 담 넘어 달려와 마스크를 벗기는.
♧ 홀에미섬* - 이애자
대정 땅만 밟으면 살아나는 바람이라
대정 땅만 밟으면 살아나는 불씨라
누구라 이곳에 와서 얕은 생각 품을까
지아비 보내고 자식까지 보낸 어미
부러, 저 거친 물살에 맘 다스리며
긴긴 날 홀로 나앉아 촛불 하나 켜는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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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슬포 앞바다에 있는 바위 섬
* 계간 제주작가 2022년 봄호(통권 제76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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