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새
보아라, 새파랗게
바람 부는 푸른 날
우리 가슴 속엔 새해가 떠오른다
탐라 오천 년
영욕이 흘러 흘러
드높아 가는 한라
제주바다 짙푸르러 가난과
한숨의 껍질들
벗겨내자 새 천년
새 제주 탄생했나니
천지
새하얗게
날아오르는 불새
꿈꾸는 불새 되어 우리 모두
이 섬
온갖 빛나는 그리움들
한데 모아 눈부시게
예술의 꽃
노래 불러
제주를 꽃피워내자
세계인들
그 꽃 속에 살게 하자
물안개 흐르는 백록 정상에 서면
수평선
아득히
찾아 떠돌던 젊은 날
눈물 속으로 젖어드는
새 이어도여!
보아라, 찬란하게
새 하늘 열려 오나니!
♧ 연어의 귀향
몇 년 만에 돌아가는 길이냐
태평양
그 깊고 넓은 바다 어디쯤
시퍼렇게 떠돌다
하천이 폭포 되어 뛰어내리기도 하는 곳
건너
따스한 햇살
만물 키워내는
그 아름다운 곳
회색곰들
흰부리독수리들
우리 죽음 겨냥하고 있다지만
우리는 어쩌지 못하리
달 없는 밤에도
별 없는 밤에도
우리는 우리 죽음 헤엄쳐
귀향하느니
배고픈 너희들, 너희들아! 과연
우리 죽음 뜯어먹고 살겠느냐
핏빛 그리움들
바람결에 녹아나는
아아
그 곳
철없던 어린 날 떠나
수만 리
낯선 세상 떠돌다
철들고 나서
빈 손 들고
마지막 번지 없는
고향
죽음 한줌 ㅈ등에 지고
나를 찾아가느니
♧ 입춘立春 무렵
손녀 얼굴 보는 입춘 무렵
서울은 영상이다
초점도 못 맞추는
40일짜리 눈동자에
어리는 할아비 얼굴
산그늘처럼 보얗구나
아엠에프 극복했다 세상은
이제
봄이라지만
아직
멀어
늦겨울 한강이
겨우 살얼음 머리칼 풀며 흘러간다
황해로 황해로만 흘러간다
그래 봄 오는 제주로 가자
봄빛 찾아보지만
국제자유도시
어쩌구 떠드는 제주에도
마찬가지
봄은 오지 않았다
어느새
보얀 눈동자에
어리는 봄
얼굴
너무 이른 봄
졸음에 고즈넉이
흐리구나
♧ 아주 자그만 노래
아무것이나 사양하지 않는다
가장 유치한 장난감들
색연필들
글자익히기 책들, ㄱ 기역, ㄴ 니은…
모두 네 살짜리 언니가 쓰던 것들
이 세상
자그만 손에 잡히는 것들
건드린다
돌린다
맛본다
모두
먹으려 하지만 먹지 못한다 그러나
아무 것도 즐겁구나!
똥 냄새로 열리는 장난감 세상
즐겁다
먼지 하나 없다
운다, 똥을 싼다
열 달짜리 생生, 지구 끝까지
잠자는 것을 밀어내 버린다
♧ 파르르르
천지가
하나로
타오른다
서녘하늘로
날아가는
새 한 마리
어느새
하늘로
잦아들어
아득히
풀린다 노을로
날갯짓
그림자만
파르르르
파닥인다
금빛으로
남아
♧ 동학사東鶴寺
가는 길에
비 내린다
유흥 손님들
관광 자동차들
싸구려 기념품들
넘쳐난다
계룡산
동학사
나무관세음보살
빗속으로
벚꽃들
무성하게 자라나는
팔도 사투리
이윽고
빗속으로 진다
컴컴하게
오는 길에
비 내린다
*문충성 시집 『빈길』 (각, 2008)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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