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김혜천 시집 '첫 문장을 비문으로 적는다' (5)

김창집 2022. 5. 7. 00:38

 

기척

 

먹의 농담을 풀어헤친 한 폭의 적막

 

삼릉 소나무 숲

 

물안개가 뿌리를 깨운다

 

제 몸을 비틀어 직립하는 나무

 

거북등 껍질 속에 어제의 긍지를 숨기고

 

나무와 나무 사이 차이를 듣는 당신

 

코뮌은 꽃과 나비

 

그 중심에 팔을 뻗는 기척

 

체온이 오른 나무들이 춤춘다

 

나도 내 몸을 비틀어 물구나무선다

 

이제야 보이는 숲

 

빛이 사다리를 타고 구호를 외친다

 

안개 하나 꽃 둘, 나비 하나

 

숲에서 추방 되는 자 누구인가

 

 

 

나침판

 

담쟁이가 벽을 덮을 모략으로

도톰한 잎새를 부풀린다

모호한 경계 틈새로 촉수를 뻗는다

 

기성의 담론과

새 시대 혁신 사이 벌어진 틈새로

불온한 의도를 내민다

 

의도부터가 기망欺罔을 바탕으로 한 초록 나침판들

흔들리고 가리고 흔들리고 가리고

 

유사가 판치는 소음의 시대

나침판은 언제나 정북을 가리키고 있어야 한다고

믿고 살아온 사람들의 현기증 사이로 확성기를 켠다

 

전류의 미세한 파장으로

잠시 빠르게 좌우로 흔들리는 나침판

 

거짓은 또 다른 거짓으로 변이되고

암각을 모사하여 도시의 벽화를 그린다

서로를 겨냥한 색채가 화려하다

 

자서전을 대필하게 할 날이 오기도 전

서로를 줄줄 흘리는 기성과 혁신들이

한 봉지에 담겨 온통 물러터진다

 

팩트는 편집 가공되고

균열을 견디지 못한 벽은

스스로 무너져 내린다

 

 

 

바람의 수화

 

호기심과 환호는 거미줄에 걸리고

 

형형색색은 퇴색되었다

 

황량한 벌판에 풍장으로 누운 검불들

 

상처투성이 주검들을 한아름 안아본다

 

부표처럼 가벼워진 몸

 

바스락 신음소리 아리다

 

죽은 듯했으나 살아 있었구나

 

말라감은 네가 아니라

 

나의 내부였구나

 

바람에 섞인 사견들이

 

육체와 정신에 침투해

 

촘촘하던 직조를 흔들고 있었구나

 

삭제될 뻔했던 너와 나

 

뒤 돌아보니 여전히 이어져 있다고

 

원을 그리는 너의 손

 

 

 

빛과 어둠의 변주

 

순록 같던 어제의 말이

하이에나의 이빨로 등 뒤에 꽂힌다

 

바람 부는 감나무 가지에 앉아

간당간당 흔들리는 새

 

인간의 사고체계에서 나오는 말은

믿을 만한 것이 못 되는구나

 

원인은 언제나 웅크리고 있었으나

먼 곳만을 바라보는 너

 

머물러 있지 않는 구름처럼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어둠에서 빛까지

빛에서 어둠까지 혼란과 모호

 

어둠이 몸에 스밀 때

자기 얼굴을 바라볼 일이다

빛의 변주에 올라타 볼 일이다

 

색이 몸에 물들 때

귀싸대기 한 대 얻어맞아 볼 일이다

 

 

 

성수동 엘레지

 

광장처럼 밀려든 청춘의 미래가

공기 중에 떠있다

 

이곳은

타다 남은 골판지 박쥐의 공중이 배회하던 곳

새가 되길 꿈꾸던 젊음이 막무가내로 달아오르던 곳

유통기한 지난 한 무리의 시선들이 한낮을 태우는 곳

아메리카노 아홉 잔과 유자차 세 잔을 시켜 놓고

옛 기억을 휘휘 저어대던 곳

 

노출된 시멘트 뼈대는

노동의 마디를 잊지 않으려는 은유거나 재현이다

 

손가락이 잘려나가는 줄도 모르던

어린 가장의 비애

할아버지의 시간이

흰 페인트칠 뒤에 박제되어 있다

 

솟대를 걸었던 장대

미루나무가 있던 자리

아침을 열던 미닫이문이 있던 자리

 

웃음을 나눌 재개발의 신화는 완성될 수 있을까

 

시간을 굽는 성수동 빵 공장에서 흘러나오는

부드러운 향기에

잃어버린 허기를 다시 앓는다

 

 

 

호랑이

    -호미곶虎尾串

 

조선 10경을 내달리던 호랑이가

 

밀렵꾼에게 총상을 입었다

 

압록강은 노을처럼 붉게 물들고

 

동해엔 핏빛 꽃잎들이 앞 다투어 졌다

 

어른들은 부단히 산골을 먹였으나

 

부러진 허리에 석고를 댄 채

 

누워 신음하는 칠십 년

 

아직도 숨어 번뜩이는 이리떼 눈빛

 

통한의 칠순 넘기고

 

장기 읍성에서 다시 맞는 일출

 

금 화분 들고 너울너울 춤추는 큰 바다

 

꼬리 흔들어 호령하리라

 

상생의 손 높이 들어 외치리라

 

이제 가슴 열어

 

우리라는 이름으로 함께 살자고

 

 

               *김혜천 시집 첫 문장을 비문으로 적는다(시산맥, 2022)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