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도 할아버지 – 조병기
해풍에 바랜 세월이
억새꽃으로 빛나고 있었다
바위 벼랑 소나무 아래 앉아
떠나온 고향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길 잃은 배 손짓하며 쉬어 가라 이른다
거친 파도에 뼈 씻어 바래며
할아버지는 한 생애를
섬에 뿌리고 있었다.
♧ 도라지꽃 – 임영희
이장댁 새며늘의
크고 작은 이바지 보따리가
고만고만 참하기도 하다
반가의 안목 있는
안사돈의 여문 손끝에
음전한 솜씨가 겉볼안이다
유난히 곱게 짠
저 큰 보랏빛 보자기 속엔
도대체 무엇이 들어 있을까
조바심 이는
마을 아낙들이 궁금증이
이장댁 높은 담 밖에서
쑥덕쑥덕 쑥덕공론이다
♧ 미황사 - 이화인
미황사에 가면
늙고 가난한 눈먼 부처가 빛바랜 절에 산다
배가 고프면 한 평 남새밭에서 머위를 뜯고
흐르는 계곡물로 배를 채운다
기왓장이 쩡쩡 금이 가는 섣달그믐이면
함박눈이 펑펑 내려 빈 쌀독에 소복이 담아놓는다
부처는 첩첩 산 땅끝 먼바다까지 내려다보고도
아는 게 없다고 손사래 친다
하루해 느지막이 내려오는 산 그림자와
기별도 없이 불쑥불쑥 올라오는 바닷바람과
멀뚱멀뚱 내려다보고만 가는 뜬구름이 친구다
하루 내내 적막을 쓸어 담던 풍경 속 물고기도
외롭고 너무 외로워서
잉잉 울면서 바람 따라 먼바다로 떠났다
미황사 눈먼 부처를 위하여
바람은 팔만사천의 경을 큰 소리로 읽고
구름은 시시때때로 아랫마을로 띄워 보낸다.
♧ 고해 – 최윤경
털어놓을 게 없는데 자꾸 꺼내 놓으라 한다
더는 할 말이 없는데 계속 말하라 한다
감추는 게 아닌데 속인다고 그런다
막다른 골목을 걷고 싶지 않은데
그 길을 걸으라고 독촉한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이 많은 세상에
번역되지 못한 말들만 허공으로 흩어지고
살아가면서 억지로 비우고 버린 탓에
텅 빈속이 쓰리다
더 이상 할 게 없다
♧ 나는 싸우러 간다 – 이기헌
아이들은 학교에 가고
나는 싸우러 간다
전투는 끝없이 이어졌으나
봄꽃으로부터의 휴전제의는 있었다
마땅히 거부할 명분이 없어
한낮에 꽃길 만개한 천변을 걸었다
아이들은 봄소풍을 가고
나는 전쟁터로 간다
장문의 유서를 구구절절 썼으나
누구 하나 읽어주지 않았다
또 다른 유서를 쓸 것인지
아니면 탈영할 것인지는
선뜻 결정할 수 없었다
아이들은 집으로 돌아가고
나는 다시 싸우러 간다
♧ 자두꽃 – 남대희
이른 봄
하얗게 센 머리에
비녀를 곱게 꽂은 할머니는
밭둑에 앉아서
늘 하늘을 쳐다보시더니
어느 바람 심하게 불던 날
홀연히 서쪽하늘로 날아가셨다
노을은 불타올랐고
붉은 도화는 자분자분 마을 안까지 들어와
치맛자락을 여미며 밤을 밝혔다
할머니 떠나신 자리에 두견새가 날아와 앉았다.
* 월간 『우리詩』 2022년 5월호(통권 제407호)에서
* 사진 : 백작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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