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미줄
제 몸의 진액을 뽑아 천상에 집은 지은 거미
어부가 허공에 그물을 짜듯
이음과 이음으로 마디를 만들고
모퉁이 돌 때마다 이슬방울 달았다
서로를 비추며 함께 빛나는
마디마다 달린 구슬
인간은 자연에
물질은 정신에
공간은 시간에 투영되어 하나가 된다
궁에는 중심이 따로 없고
크기가 다른 방들이 겹겹을 이룬다
어스름 저녁 나비 한 마리 궁에 들었다
나비 작은 날갯짓에
일제히 바르르 떠는 구슬들
♧ 낙화
마방이 잠시 먼 산을 바라보는 사이
꽃 한 송이
떨
어
진
다
천 길 협곡
몽롱하게 멀어지는 방울소리
오색 술 달린 안장을 상 받은 날이다
피멍으로 짊어진 모차와 소금
재를 넘을 때마다 하나씩 빠지는 발톱
각혈로 얼룩진 차마고도
벗어버리자
등짐으로 닿지 못할 그곳
명성으로는 더 멀어지는 그곳
버리고 다시 태어나자
바람의 변주를 타고
오방색 춤사위
허공을 훠이훠이 젓는다
♧ 풀에 대한 에스키스
누가 그를 잡풀이라 하는가
그것은 네가 그에게 붙인
어이없는 이름일 뿐
그는 건기에 사막을 이겨낸 불꽃
쓰나미를 건너온 풀꽃
탈출을 위해 기웃거리지 않았다
밖에서 오는 것들은 모두 동냥이었므로
수없이 발목을 잡던 의식의 동냥치를 몰아냈다
그는 생존을 위해 벽을 넘어야 하는 천사
벽과 벽의 틈새로 뻗어 나가는 촉수
공간을 넓히면서 풀꽃을 피우는 유목민
차가운 금속성의 세계에서
연금술사의 망치 소리를 들으며
깊숙한 공감을 이끌어 내는 물음과 함께
온 힘을 다해 담아내는 푸른 하늘
♧ 침묵의 바다
꽹과리 소리가 도심 광장을 흔드는 오후
데스마스크를 쓰고
소음과 소음이 손잡고 걸어간다
화려한 수사와 기교를 목에 걸고 춤춘다
등에는 유명브랜드 라벨을 붙이고
벌레 울음소리 누가 더 큰가 경쟁한다
금빛 그물을 지상에 내려
밤의 소리를 건져 올리는 달의 여신
아프로디테 그의 고향은 침묵의 바다
사물 깊은 곳에 고이는
말 없음이 배경이 된 말은
표면을 뚫고 올라오는 용암 덩어리
대상을 높이고
상처를 감싸 안는다
빛 한 줄기 다시 머금기 위해
정신의 아치를 치켜세운다
몸 안에 짓는 사원의 우람한 기둥을 세우기 위해
휴식이 필요한 언어
자주 침묵에게 소환되기로 한다
뭉친 것을 풀며 흐르는 강물 따라
쓸모없어 보이는 황무지 돌밭에서
♧ 포란
왜우꽈
그냥 여기 살았을 뿐
나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지슬 삶아 먹으며
수선화처럼 순백의 일상을 살았을 뿐
이념과 평화조차 모릅니다
그냥 여기 무심히 피었을 뿐인데
동백이 붉다고 어찌 나를 쏜단 말입니꽈
보리빵집을 꿈꾸던 늙은 어미 골다공 돌무더기 곁으로 물결치는 청보리 초록 바다 함성 지르며 피어난 유채꽃 노란 바다
제주 바람엔 다른 곳에서 들을 수 없는 소리가 묻어 있다
보리밭 보리 베어지듯 이유 없이 스러져간 원혼들의 피울음이 이명처럼 울렁거린다
제주 공항이 수많은 주검이 묻힌 곳이라는 걸 아는 이 많지 않다 푸른 바다를 즐기며 유람하는 곳곳이 무차별 총탄에 죽어간 이들의 마을이라는 걸 아는 이 많지 않다
긴 침묵 속에선 무엇이 포란抱卵 하는가
토해낸 각혈이 응고된 기암괴석
무등이왓엔 울분을 참지 못한 고사리들만
주먹 쥐고 쑥쑥 올라온다
잃어버린 마을 어귀
늦도록 피지 않는 팽나무 순
각질 떨어지는 마른 등걸
봄은 어디쯤 오고 있는가
♧ 풍마風馬
오색 룽다를 내어 걸어요
말씀은 바람에 실려 보내요
마음마저 닿을 수 없는 먼 곳을 향해 펄럭여요
청정하고 끈질긴 사람들의 원願을 따라 걷는 길
장대 끝에 깃발을 달아요
장대 끝에서 흔들리는 마음을 바라보며 가만히 두 손 모으면
원인 모를 말간 눈물
쌓아두었던 돌무더기는 무너지고
어머니가 흰 죽을 쑤어 놓고 기다리는 베이스캠프
좀 더 단단히 조여매고 걷는 길
운무로 덮인 저 산 위에 무엇이 있을까
알지 못해 오르는 길
단단히 부여잡은 모퉁이에
룽다를 걸고
오늘도 히말라야를 오른다
* 김혜천 시집 『첫 문장을 비문으로 적는다』(시산맥, 2022)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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